두시간 정도 되는 이 영화. 앞부분 1시간 30분은 혼자 계속 낄낄거리며 웃었다. 너무나 다가오는 클린트

이 영화에서 제일 웃겼던 이발사 아저씨
이스트우드의 마음. 왜냐하면 우리가 미국에서 살면서 보수적인 미국인들이 저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했던 그 시선이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분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낄낄댈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위의 20자 영화평에서 보여지듯 클린트 옹은 그래도 대화할 만한 보수 또는 공화당 지지자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리버럴리스트들에겐 조금 불편해야 맞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그랜 토리노가 별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아카데미나 골든 글로브에 노미네이션조차 안된 이유도 미국의 리버럴리스트들이 보기에는 불편한 내용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큰 줄거리만 놓고 보면 외국인을 비하하고 총기 휴대를 긍정하며 지독한 마초 성향의 고약한 늙은이의 이야기 아닌가? 게다가 은근히 기독교(천주교)를 까는 듯해도 철창에 가두어 놓은 아이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이방인을 대신해서 죽는 장면에서는 아예 예수의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라니.
게다가 사실 이 영화에는 큰 단점도 하나 있는데 이는 몽족 배우들이다. 뭐 다른 몽족들이야 이방인스럽게 어색하다고 쳐도 주인공격인 타오는 좀 연기가 되는 사람을 골랐어야 하는 것 아닐까? 특히 그는 계속 무시만 당하는 자코비치 신부를 대신해서 "Mr.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고해성사를 받아내는 역이었단 말이다. 타오가 자기도 같이 가겠다며 소리를 치는 장면이 어찌나 어색하든지 손발이 약간 오그라드는 느낌...
하지만 이 영화가 그래도 사람들의, 또는 내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고약한 폴란드 출신의 미국인, 그렇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이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명 <더티 해리>나 <황야의 무법자>를 보면서 악당은 싹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마초 영감님의 내면을 속속들이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 내면은 우리가 희망하는 바로 그 내면이다. 그래도 저 영감님도 따뜻한 사람이었어, 뭐 이런 것 말이다.
약간 샛길로 새자면 지금 장하준 정승일의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읽고 있는데 그 대담의 사회를 보았던 <말>지의 기자 이종태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시청앞에서 성조기 들고 빨갱이 때려잡자는 데모를 하는 노인들의 "초라한 슬픔"에 대한 느낌, 과거 독재정권에 대한 부정이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모욕으로 느끼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아마 Mr. 코왈스키씨께서 그렇게 죽지 않으셨으면 백악관 앞이나 디트로이트 시청앞으로 가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성조기 흔들면서 시청앞에서 가스총 쏘시던 할아버지가 그 가스총으로 동네 양아치들에게 위협당하던 아가씨를 구해주고 조폭에게 죽을 뻔한 어린 소년을 구해준다면? 누가 환호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 주변의 하이랜드 시티 (미시건주)에 사는 전직 포드자동차 직원 월트 코왈스키는 한국전 참전 용사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으로 동네 신부에게 남편을 부탁하는 바람에 신부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찝쩍거리고 미국제가 아닌 "일제" 토요타 딜러를 하는 아들놈에, 세상 말세임을 느끼게 해주는 손녀에, 게다가 옆집에는 어디서부터 굴러들어왔는지도 모르는 몽족 일당들.
우연히 몽족 갱들이 자기 집 lawn을 침입해서 총을 들고 나가서 내 쫓아버리지만 하필이면 그게 옆집의 타오를 도와주는 일이 되어버려서 타오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게다가 타오는 그의 보물 1호 자동차인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고 했던 도둑놈이었던 것을 알게 되고 일은 계속 꼬여서 몽족들과의 인연이 깊어진다.

80먹은 고목의 자화상
이렇게 놓고보면 <늑대와 춤을>, <포카혼타스>, <최후의 사무라이> 등을 읊으며 오리엔탈리즘을 떠들어야 하는 시츄에이션인데 이 영화는 큰 욕심내지 않고 소박하게 나아간다. Mr. 코왈스키는 월트가 되어서 타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고 서로를 이해하고 미국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여기까지는 정말 즐거운 영화로 낄낄 거리면서 영화를 보게 되는데 갑자기 몽족 갱단이 타오에 이어 타오의 누나인 "수"를 성폭행하기에 이르자 영화는 급반전, 무거운 결말로 향한다.
누나의 복수를 하러 가길 원하는 타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항복한 어린 인민군을 쏘아 죽이고 훈장을 받은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려온 이 할아버지가 자기 평생의 트라우마를 타오에게까지 물려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타오를 고해성사하는 방과 같은 지하실에 가둬버리고 홀로 적들을 맞이하러 나간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방법은 나를 죽여 적들을 제거하는 방법. 그의 시도는 성공하고 그는 수많은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둔다. 그리고 이번엔 그의 장례식. 월트는 애송이 신부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일깨워준 스승이 되었고 월트의 유언은 그가 아끼던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타오는 그랜 토리노를 타고 해변(미시건 호변?)을 달리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제목의 그랜 토리노는 그 자체로 거대한 미국의 상징이다. 큰아들이 일하는 일제차의 작으면서 놀라운 성능, 뛰어난 연비와 비교해보면 F-car인 그랜 토리노는 크기만 하고 기름만 먹는 전형적인 미국차이다. 물론 앤티크로서는 훌륭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노 할아버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은 이 미국(그랜 토리노)을 이방인인 몽족에게 줌으로서 그들에게 앞으로 이 나라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서 겸손해지는 인간의 미덕.
아..덧글을 부르는 포스팅입니다.저 역시 중반까지 그야말로 낄낄거리며 웃다가,순간 말을 잊은채 코끝이 시큰해지더군요.엔딩 크레딧 올라갈때의 장면과 배경음악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영화 보고 올렸던 포스트 제목이 '그를 오래 보고 싶다'였는데 가능하면 연출가로서의 그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입니다.네이버에서 음악 찾다가 포기하고 잊고 있었는데 덕분에 잘 듣고 갑니다! ^^
답글삭제@보라보라 - 2009/04/17 02:04
답글삭제아마 영화출연은 마지막이지만 감독은 계속 할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심려하지 마시길. 혹시 압니까, 연기도 죽을 때까지 할란다, 이러고 다시 복귀할 지. "드라이빙 미스터 데이지" 이런 영화해도 좋을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