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기 한홍구 교수가 말한 "참된 보수"를 지금 세상에서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손봉호 교수을 꼽겠다. 선비적인 풍모와 함께 "철저한 원칙론자"인 그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것 빼고 (하긴 요즘은 예전에 안티조선하던 놈들도 쓰는 판이니) 한국 기독교 지성계에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그가 얼마전 동덕여대 총장에서 해임되었다는 뉴스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땅에 원칙론자가 발붙여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만든 이 사건을 당하며 과연 손봉호 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손봉호 총장의 죄목이라는 것, 그건 바로 이땅의 백성들이 현 대통령에게 붙인 죄목과 99% 동일하다. 언론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면 손총장의 죄목은 "재임 후 학교측과 총학생회, 교직원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독단적으로 학교를 운영"해왔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회 갈등 심화, 독단적 운영,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그런데 그 갈등이라고 하는 것이, 총학의 부정선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5명 밖에 되지않는 교수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정 반대편의 과거 재단이사장측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부풀려지고 방관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양 갈등 당사자들의 사이에서 원칙을 지켜보려던 교육자의 파면이 현 대통령의 탄핵사태와 겹쳐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지금 손총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난 그게 제일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또는 이 땅에서 원칙론자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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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3일 금요일
손봉호 vs 노무현
2006년 8월 11일 금요일
두 얼굴의 교육에 대해...
아래 퍼온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우리 교육이 문제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해법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반대의 생각들이 섞여있는 경우를 종종본다. 마치 현정권의 외교가 문제라고 하지만 한쪽에서는 너무 친미라고 하고 반대쪽에서는 반미라고 하듯이 말이다. 언제나 이 두 극단은 상호절충을 모르고 그 상위 권위인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믿듯이 교육에 있어서도 그 두 얼굴이 뚜렸하다.
미국의 교육을 칭송하는 부류들이 가장 내세우는 점은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지옥과 같은 공부와 과외등을 안하거나 덜해도 된다는 점이다. 그저 남(주로 미국인)보다 조금 더해도 좋은 성적을 올리니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적고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논리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와 과외를 안하거나 덜해도 되게 만든 정책이 바로 현재의 정책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학생들의 학력이 낮다느니 이런 소리가 나오고 나보다 공부못하는 애들이 서울대를 가게된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공부잘하는 순서대로 입시사정표의 학력고사 커트라인 순서에 맞게 가야지 3등한 나는 한양대가고 4등한 놈이 서울대가는 꼴은 못보는 것이 아닐까?
즉 그 두얼굴이란 내아이가 공부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좀 행복했으면하는 심리와 그래도 공부잘하는 놈부터 순서대로 서울대를 가야한다는 입시위주의 심리가 상충된다는 것이다. 물론 중압감없이 행복하게 공부해서 서열별로 대학가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 서열이 완화되지 않는 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어디서나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적어도 대한민국의 10개 또는 그 이상의 대학 졸업장이 거의 동등하게 대우받지 않는 한, 그 서열이 살아있는데 입시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고 입시가 우선되면 교육이 정상화될 수 없다... 는 것이 얼마전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눈 다음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2005년 10월 14일 금요일
강정구교수 사건을 보며 <공동경비구역 JSA>를 생각하다
JSA는 진실에 관한 영화다. 여기엔 서로 다른 진실이 있다. 서로 다른 진실이라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이지만 아무튼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보는 남과 북이 있다. 그리고 진실은? 그 가운데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진실이 아니다.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인물, 소피 장 이영애는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한 자의 딸이다. <광장>의 이명준의 딸이라고나 할까. 왜냐면 어차피 한쪽에 속한다면 진실은 한쪽만의 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쪽도 저쪽도 아니기 때문에 중립적인 것이 아니고 양쪽의 적이다. 이것이 우리 비극의 시작이다. 진실을 대할 용기가 우리에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면 적이다.
착실하게 진실에 접근하던 소피 장은 결국 아버지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사건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유엔군 상관을 통해 이 나라에 대한 다른 진실을 듣는다. 그 진실은 무엇인가. 그건 “진실이 숨겨져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 한반도라는 사실이다. 그건 한 사진 속에 실재했던 이수혁, 오경필, 남성식, 정우진, 이 네 사내가 만들어낸 사건의 진실보다 더 상위의 진실이다.
우리는 흔히 일본인들을 위선적이라고 한다. 다분히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퍼뜨린 혼네(본심)와 다테마에(겉마음)라는 예를 들어 말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말한다. 한국인들은 직선적이고 솔직하다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건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 주로 그렇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한국인들이 더 위선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무슨 한국인을 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살아본 내 경험으로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대단한 나라다. 가진 것 없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좀 자랑할 만 하다. 솔직히 이젠 외국에 나가도 크게 꿀리거나 그들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지거나 이런 것 그다지 많지 않다.
▲ 1인 시위를 벌이는 시민
ⓒ2005 오마이뉴스 김덕련
교육이나 의료제도도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미국이 나을지 모르나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한국이 결코 못하지 않다. 이건 한국에 사는 사람만 잘 모르는 사실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으니 아직까지도 우린 사회적인 위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에 못지않은 법은 있지만 무용지물이다. 국회엔 윤리위원회가 있지만 아무도 징계 받지 않는다. 탈세범이 한국에서 사업하는 놈 중에 탈세 안 하는 놈 있냐고 큰소리친다. 법대로 영업하는 신문사도 없고 연구비 안 떼어먹는 교수도 별로 없다.
영화 <투캅스>에 보면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신참 형사 박중훈이 비리형사 안성기에 열받아 법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인다. 그랬더니 경찰서가 완전히 포화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대충 대충 사람 봐가며 해야 한다.
이게 우리사회를 살아가는 지혜이며 진실이다. 그러니 주로 걸리는 건 미운놈이고 그러니 언제나 음모론이다. 진실은 상황에 따라 해석되며 신뢰 수준은 낮고 약점 은폐형 문화가 기승이다.
법무장관이 검찰총장에게 “사상 최초”로 지휘권을 발동한 것도 그렇다. 우린 다 알고 있다. 과거엔 검찰총장이 지휘를 받은 정도가 아니라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가 난 것처럼 호들갑이신가들! 그냥 지휘권 발동하지 말고 조용히 불러 나중에 한자리 준다고 구슬리거나 도청이라도 해서 약점 잡아 시켜야 좋겠는가?
난 이번 일을 보고 오히려 즐거웠다. 그건 강정구 교수의 의견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천정배 장관이 법에 정해진 자기의 권리에 따라 일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보안법 적용해서 수사해라 마라 이런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인신구속 여부에 대한 지휘를 한 것이다. 법에 정해진 권한인데 대체 뭐가 문제인가. 문제 있으면 검찰이 계속 수사하면 될 일이지.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속사보다 침착하고 냉철한 상황판단이 중요함을 오경필에게 배운 이수혁은 바로 그 침착해야 할 상황에서 오경필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다행히(?) 총알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둘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평화 유지를 위해 진실을 숨겨두고 떠나는 소피 장에게 진실을 고백한 이수혁은 결국 자신에게 총알을 박는다. 어쩌면 그건 진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느 독특한(?) 학자의 주장을 감옥에 집어넣어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진실을 감당할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조갑제, 김용서, 한승조 등등의 그 많은 반정부, 반민족 발언에 그랬듯이 대범할 수는 없는 것일까?
끝으로 강정구 교수의 주장에 대한 의견은 노하우21 김창환님의 주옥같은 글 한 구절 인용하고 마치련다.
“입으로는 미국은 상종 못할 학살자로 믿는 아버지마저도 미국에서 교육 받도록 안식년 때 아들을 미국에 데려가는 이 현실. 이 얼마나 훌륭한 자유경쟁 시장의 작동에 대한 증거입니까. (중략) 그런 아버지 밑에서 평생을 자라도 충실한 자유경쟁 사회의 일원이 되는데, 이 일단의 무리들은 수업하나 들으면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위험인물이 된다고 공상을 한다는군요.”
자신감을 가져라! 대한민국이여!
2005년 3월 9일 수요일
하루하루에 주의 선하심이
뭐 일종의 컴필레이션 앨범이니까 대단 한 것은 아니지만 앨범 이름이 <축복의 통로>라고 한다. 축복과 교제에 관한 찬양 16곡을 모은 앨범이다. 작년 10월말에 나왔다는데 판매 순위가 10위 안에 드는 것을 보면 그래도 실패작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좋은 노래가 많다는 뜻이지...^^)
이 곡은 내가 죠이 대학부 회장으로 섬길 때 만든 곳이다. 당시 죠이 대학부 임원, 연기연 사역, 대학원 진학 준비(라고는 솔직히 한 것이 없지만)등으로 너무 바쁘게 살고 있을 때 죠이 부회장이었던 은주 누나가 내게 많은 격려 편지를 보내주었고 그래서 그 은혜에 보답코자 생일 선물로 만들어 준 곡이다. 작사가 김은주라고 되어있는 것은 누나가 내게 보내준 편지의 내용을 추스려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다가 우연히(?) <많은 물소리> 제작을 죠이대학부에서 돕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이 곡이 그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가사의 뼈대는 빌립보서 1장 9절-10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는 말씀이다.
아무튼 이 곡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의 말인 것 같다. 죠이에선 그래도 꽤 불린 곡인 것 같은데 가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이 곡을 알고 있을 때는 기분이 참 묘하다.
내가 만든 곡이지만 저작권 관계로 전곡을 다 들을 수 없다.^^ 그나마 중요부분만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데... 즐감하시길...
(세상에 이 노래를 도토리를 주고 살 수 있다니...ㅎㅎㅎ 배경음악으로 나오므로 정말 즐감하시길!!! 나레이션은 좀 그렇다...)
하루 하루에 주의 선하심이 당신에게 끊임없고 영원하기를
주님의 날까지 당신 인격이 진실하여 허물없이 이르기를
지식과 총명이 풍성해 지기를
당신이 주님의 선대하심을 보기를
축복합니다. 당신의 좋은 날
축복합니다. 주님 사랑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2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립보서 1장 9절-10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시편 119:65)
2005년 2월 4일 금요일
산동네-삼양동에서
신경림시인의 시집 <길>(1990) 에 수록된 시.
이로서 삼양동이 나온 문학작품은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청준의 <낮은데로 임하소서>
그리고 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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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삼양동에서
집에서는 왕자처럼 살고
나와서는 잡초로 행세하는 자들이 싫어서
일년 내내 동네 밖을 안 나가는
딸기코 대서방 서사는 내 바둑동무다
남 앞에서는 옳은 소리만 하고
전문지식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면서
자기 자식들은 몰래
외국으로 빼돌려 공부시키는 자들이 미워
신문도 방송도 안 본다는
허리 굽은 양복점 주인은 내 술동무다
한 스무 해 징역을 살고 나와보니
온잡 잡짓으로 돈벌고
또 여편네 앞장세워 출세한 것들이
투사가 되고 지사가 된 세상이 어이없어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지만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보는 줄 알지만
아아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눈도 코도 없는 줄 알지만......
2004년 3월 7일 일요일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통하였느냐..." (나와 우리의 소통에 대하여)
간만에 시간을 내서 영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Lost in translation)>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고른 첫번째 이유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2003년 헐리웃을 가로지른 <매트릭스>, <킬빌>, <라스트 사무라이> 등을 보면서 최근 헐리웃에서 왜 그렇게 일본에 관심을 가지는지가 궁금했었습니다. 두번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1순위라던 빌 머레이의 연기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숀 펜에게 상을 빼았기자(?) 사회자 빌리 크리스탈이 “Don’t go, Bill, We all love you!”라고 했던 말이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세번째는 아마도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각본상을 휩쓴(반지의 제왕이 후보에 없었으니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가 감독을 했다는 호기심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영화였습니다.
평론가들에게 평균 별 넷을 받은 영화답게 약간은 지루한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감히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루한 여백을 나름대로 잘 메워줄 화두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화두는 바로 ‘소통’입니다. 이 영화는 소통을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 그거였구나’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 다시 한 번 보면 더 그 의미가 명확해지는 영화를 오랜 만에 만났습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소통이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일단 언어가 다른 물리적인 공간, 일본에 1주일 머무는 사람들 입니다. 소통의 방식이 다른 곳에 온 것입니다. 전세계에서(아마 잘 사는 나라 중에 그렇다는 거겠죠) 영어가 제일 안통한다는 바로 그 나라 말입니다. 영화는 계속 영어와 일어가 전혀 맞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줍니다. CF감독의 무수한 말을 한 줄로 설명해내는 통역이나, 병원에서 질문에 상관없이 일본어로 열심히 설명해주는 자원봉사자의 모습은 뜨악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언어가 같다고 소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소통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혼 25년을 맞은 빌 머레이는 아내와 소통이 안되고, 이제 결혼 2년된 스칼렛 죠핸슨도 남편과 도대체 소통이 안됩니다. 빌 머레이의 아내는 시차가 정반대인 일본을 생각못하고 남편이 자는 시간에 팩스를 보내옵니다, 관심도 다릅니다. 카페트 색깔을 어떻게 할까에 대해 그는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스칼렛 죠핸슨의 남편은 너무 일에 바빠 자기 아내를 혼자두기 일 수 입니다. 같은 영어를 써도 대화가 겉돕니다. 그러니 밤마다 호텔 바에 나와서 혼자 위스키나 마실 밖에요.
그러다 둘은 우연히 합석을 하고 서로를 알게 됩니다. 여기가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갈라지는 지점인데 <러브 어페어>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는 달리 이 영화는 이 둘이 서로 좋아하게 되는 것인지 사랑에 빠지는 것인지조차 애매합니다. 마지막 귓속말을 관객에게 들려주지조차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둘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서로 통했다는 거죠. “통하였느냐”라는 광고 카피는 이 영화에 사용됐어야 했습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정체불명의 제목은 그만두고 말이지요.
제가 말끝, 또는 글끝마다 조선일보에 대해 타박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문제)가 우리사회의 의사소통의 통로를 근본적으로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최근 한국 사회의 분열(?)에 대한 우려의 근본에 바로 이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일보에서는 마치 이 문제를 일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준동으로 왜곡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정치뿐만이 아니라 사회, 교육, 문화, 종교 전반에 걸친 소통의 메커니즘 문제입니다.
그 일례로 노무현 대통령이 잘못했다는 그 ‘부적절한 언사’들의 대부분을 직접 동영상으로 거의 빠짐없이 보고 들은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부적절한 언사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이 신문 기사화 되면 아주 요상하게 바뀌어 버립니다. 전혀 주제와 상관없는 하나의 발언이 문제가 되고 논쟁이 됩니다. 아직도 대통령이 가장 잘못했다는 것이 그 어떤 정책적인 것도 아닌 ‘언사’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소통의 통로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소통은 어렵습니다. 소통은 말이 통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 안통한다고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영화에서 가장 지루한 장면이었던 일본 재즈연주자들과의 술집 장면이나 가라오케 장면은 말은 잘 안통하지만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완전한 소통을 나타내지는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말이죠.
이 영화를 보다가 <공동경비구역 JSA>가 생각났습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어느 면에서 소통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종반에 끝까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이영애에게 유엔군 장군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판문점은 진실을 감춤으로서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게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관통하는 소통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소통되지 않으면서 소통한 척 하는 것, 또는 거짓으로 소통하는 것 말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월간조선과 인터뷰한 기사 제목이 “순진한 휴머니즘으로 남북 분계선을 넘으면 인생이 박살난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여서 곤욕을 치룬 적이 있습니다. 하도 어이없는 질문만 하길래 농담 삼아 한 단 한마디가 제목이 되었답니다. 이게 그네들의 방식입니다.^^)
기자들이 대통령을 데려다 어느 당을 지지하냐 지지할거냐 물어놓고 우리당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더니 탄핵을 하겠답니다. 정범구 의원이 고백했듯이 과거 대통령들이 소위 유명인사들을 독대하고, 선거에 나가라고 해서 공천주고, 자기 국회의원 만들었어도 아무 문제 삼지 않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결국 대통령이 누구를 지지할 지 누구나 다 알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그들이 원하는 소통 방식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제 그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게시판에서, 그리고 블로그에서 과거에 감추어졌던 개인의 생각들이 수도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매개체(미디어)를 통하지 않고 이젠 직접 소통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받아 들이느냐 아니냐,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존중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사회적인 측면이 아니고 개인적인 측면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외국에 살면서 사람들이 받는 최고의 괴로움이 바로 이 ‘말’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받는 상처의 대부분도 바로 이 ‘말’ 때문이구요. 뭐 모국어가 없는 세상에 사는 괴로움이야 북한에 갔다가 독일에서 생활하던 황석영씨가 구속을 각오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말’이 소통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나 선교단체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나 소위 뒷다마까는 것 문제다라고 하지만 결국 저만 봐도 자기 이야기보다는 남 이야기를 더 하는 듯합니다. 문제는 외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상태에서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더 강하다는 것이죠. 연고주의 나라 대한민국의 초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참 친한 것 같으면서도 “정말 저 사람이 나를 신뢰하나?”하는 느낌들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애기 때문에 교회 구역예배 참석도 어렵고 사람들과 대화할 시간 조차 내기 어려울 때는 더욱 그런 것도 같구요.
공간적, 시간적, 심정적 제약으로 소통이 안되는 사람 둘이 만나 '통하는' 영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Lost in translation)>이 좋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생각들을 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죠. 아무튼 제대로 소통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게시판에 이런 글을 끄적거리는 이유도 그때문이니까 말입니다.
2004년 1월 13일 화요일
반지의 제왕
그 유명한 반지의 제왕을 보다. 1편 부터 3편까지 약 3번씩 보았으니까 3시간씩만 잡아도 27시간을 본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앉아서 본 것은 아니고 애기 안고 트름 시키면서도 보고 밥먹고 잠깐 쉴 때도 보고, 하은이랑 놀면서도 보고 했기 때문에 3번씩 보게 되었다. 이제야 줄거리와 등장인물이 대충 한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나는 다분히 줄거리 중심적인 사람이라(일하는 것도 그렇다) 드라마를 안보는 데, 그 이유가 한 번 빠지면 자꾸 몰입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이렇게 한번에 몰아쳐서 보는 것을 더 선호한다. 아무튼 해적판으로 보는 것으로는 성이 안차서 극장에 가서 3편(왕의 귀환)을 보고 왔더니 맘이 좋다. 역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그러려면 애봐주는 극장이 많이 생겨야 할텐데… (대전의 한 극장에는 그런 시설이 있었다) 암튼 덕분에 미국와서 극장엘 다 가봤다.
잠시 동안이나마 반지의 제왕에 내가 빠진 이유는 뭘까? 아마 그건 반지를 버리는 영화였기 때문이리라. <매트릭스>를 일본 애니메이션의 계보로 풀기도 하고 양자역학으로 풀기도 하듯이, <반지의 제왕>도 보는 사람에 따라 <스타 워즈>와 대칭되는 SF 환타지이기도, <코난>과 같은 무협 활극이기도 하다. 내용으로 보자면 주인공 프로도의 충직한 정원사 샘 와이즈 갬지의 성장영화이기도 하고 어느 인터뷰를 보니 드물게 동성애적 코드의 영화라고도 하나 보다. 그러나 아무튼 내게 이 영화가 가장 색다른 영화인 것은 이 영화가 반지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 아니고 반지를 버리러 가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는 아마 우리 랩의 미국인 친구가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이 유명한 기독교 소설가인, 그러나 솔직히 이름 말고는 아는 게 없는, CS 루이스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요즘 노래 부르는 재미가 쏠쏠한 우리 큰 딸이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을 내 주위에서 들려준다는 것하고.
아무튼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이 영화가 소위 ‘절대 반지’를 찾으러 떠나는 영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왠걸, 내용은 그 반대로 악의 손에 들어가면 안되는 그 반지를 악의 소굴 한 복판에 가서 내던지고 오는 영화였다.
누구나 손에 넣기를 원하고 손에 넣으면 소유하려는 그 반지는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 ‘권력욕’일 수도 있고 현대 사회의 우상인 ‘경제력’일 수도 있고 조금 다른 종교적 버전으로는 ‘과학기술’일 수도, 혹은 또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인간, 또는 이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어디 한 두개라야 말이지…
아무튼 재미있는 것은 이 반지를 버리기 위해 선택된 사람(?)은 다름아닌 호빗이라는 점이다. 죽었다 살아나는 대마법사 간달프도 아니고, 용맹스러운 인간 아라곤도 아니고, 요정인 엘프도 아니다. 가장 작고(원작에 따르면 키 70cm정도) 보잘것 없는,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도 아닌, 그러나 음주 가무를 즐기고 언제나 낙천적인 존재인 호빗이 반지의 운반자다. 왜 그럴까? 뭐 작가가 재미로 그랬다면 할말 없지만, 어쩌면 기독교적인 사상에 정통한 작가가 호빗을 택한 이유는 그들이 가장 욕심없고 평화로운 세상 샤이어를 이룬 존재들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천국은 바로 그런자들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뭔가를 소유하면, 이라는 조건절로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행복은 만족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지 만족할 조건을 달성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자족이라는 것이 나의 수준에만 머물지 말고 우리의 수준으로 확대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나에게 반지는 무엇일까…
반지의 제왕을 꼭 책으로 한 번 읽고 싶다. 영어책 말고…^^
[덧붙여] 좋은 한해, 평안가운데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