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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0일 토요일
미네르바 사건 단상
2008년 8월 30일 토요일
오바마의 연설과 마틴 루터 킹
오늘 (미국시간 2008년 8월 28일)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후보인 버락 오바마의 연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그의 연설은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아마 오늘 오바마의 연설의 제목을 뽑는다면 "WE ARE BETTER" 또는 "NOW IS THE TIME"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 언론들 웹사이트를 슬쩍 들러보니 언론사마다 모두 다른 제목을 뽑았더군요.
그런데 맨 위 기사의 내용 중에 이런 부분이 있네요.
`마일 하이'의 도시인 덴버에서 만들어지는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왔다는 올해 65세인 맥 윌부란(사업)은 "오늘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 꿈이 있어요'라는 연설을 한 지 45주년이 되는 날이라 오바마의 후보 수락연설의 역사적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맞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29년생으로 지금 살아있었다면 나이가 80이 안됩니다. 우리나라의 YS, DJ 두 전직 대통령보다 오히려 더 어립니다. 킹 목사의 부인인 코레타 킹 여사는 지난 2006년에 세상을 떠났고 당시 죠지아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큰 뉴스였습니다. DJ (1926년생?), YS (1927년생), 말콤X (1925생), 킹 목사 (1929년생) 사진 출처 : http://www.americanrhetoric.com/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이 킹 목사의 시대는 훨씬 오래 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지냈던 동네가 킹 목사와 카터 대통령을 배출 했다는 죠지아 였는데 그 동네의 나이든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마 젊어서까지 흑인들과 같이 식사도 안하고 버스도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 세월이 많이 바뀌었죠. 가끔은 그 양반들은 과연 어떤 일생을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간혹 영문법 책에서 독해 지문으로 접할 수 있는 킹 목사의 그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행해진 연설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이가 50세 정도 이상의 미국 흑인들은 저 연설을 직접, 간접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과연 그 사람들의 감격은 어느 정도 일까요? 과연 오바마가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이 새로운 역사의 한 순간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is nation will rise up and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a stat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injustic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oppress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of freedom and justice.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I have a dream today!
I have a dream that one day, down in Alabama, with its vicious racists, with its governor having his lips dripping with the words of "interposition" and "nullification" -- one day right there in Alabama little black boys and black girls will be able to join hands with little white boys and white girls as sisters and brothers.
I have a dream today!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 and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²
This is our hope, and this is the faith that I go back to the South with.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hew out of the mountain of despair a stone of hope.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transform the jangling discords of our nation into a beautiful symphony of brotherhood.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work together, to pray together, to struggle together, to go to jail together, to stand up for freedom together, knowing that we will be free one day.
And this will be the day -- this will be the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will be able to sing with new meaning:
My country 'tis of thee, sweet land of liberty, of thee I sing.
Land where my fathers died, land of the Pilgrim's pride,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And if America is to be a great nation, this must become true.
And so let freedom ring from the prodigious hilltops of New Hampshire.
Let freedom ring from the mighty mountains of New York.
Let freedom ring from the heightening Alleghenies of Pennsylvania.
Let freedom ring from the snow-capped Rockies of Colorado.
Let freedom ring from the curvaceous slopes of California.
But not only that:
Let freedom ring from Stone Mountain of Georgia.
Let freedom ring from Lookout Mountain of Tennessee.
Let freedom ring from every hill and molehill of Mississippi.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킹 목사님 연설의 전문은 http://www.americanrhetoric.com/speeches/mlkihaveadream.htm 에서 확인하실 수 있고 킹 목사님의 연설을 직접 들으시려면 아래 유튜브를 보시면 됩니다.
2008년 7월 7일 월요일
Sicko (식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
* 제목은 약간 낚시성입니다.
미국은 어떤 나라일까 (1)
마이클 무어의 Sicko를 드디어 봤습니다. 보고나니까 왠지 제목에서 sick ko(rea)가 연상이 되더군요. 좌충우돌, 호오가 너무나 분명한 마이클 무어답게 미국을 그린 영화지만 저는 한국인이기에 그 영화에 비추어 한국을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요즘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구요. 아픈 코리아, 아픈 대한민국. 장난꾸러기 이미지의 마이클 무어 미국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그 책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HMO (Health Management Organization) 시스템에 대하여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바로 잭 니콜슨의 강박증 연기가 돋보였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입니다.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의 남녀 주연상을 모두 휩쓸었던 영화죠. 이 영화에서 식당의 웨이트리스인 캐롤(헬렌 헌트)를 작가인 멜빈 유달(잭 니콜슨)이 좋아하는데, 어느 날 캐롤이 식당에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싱글맘인 캐롤에게 아들이 하나 있고 이 아들이 아파서 아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멜빈이 자기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 사장의 의사 남편을 보내서 무료로 그 아이를 진찰하게 만들어 줍니다. 여기에 감동한 헬렌 헌트의 모습은 언제나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요.
IMDB의 명대사 (Memorable quotes)에도 이 장면이 올라와 있더군요.
Carol Connelly: Fucking H.M.O. bastard pieces of shit!
Beverly Connelly: Carol!
Carol Connelly: Sorry.
Dr. Martin Bettes: It's okay. Actually, I think that's their technical name.
미국 의료보험은 크게 HMO와 PPO로 나뉘는데 HMO는 소위 주치의 (Primary Care Physician. PCP)가 있어서 어디를 다쳤던 그 주치의를 통해 병원을 갈 수 있는 시스템이고 PPO는 주치의가 없이 그 보험이 커버되는 곳이면 아무 병원이나 갈 수 있는 시스템이지요. 보통 HMO가 더 싸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PPO는 더 비싼 대신 병원에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HMO의 경우 주치의가 가정의학과나 내과, 소아과 의사들인데 뼈가 부러졌거나 다쳐서 정형외과에 가려고 한다면 주치의의 병원(클리닉)에 가서 일단 진찰을 받고, 주치의가 referral (추천서)를 써주면 그걸 받아서 정형외과나 피부과 같은 전문의를 만나야 한다는 점이죠. 아니면 방법이 그냥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는 것인데 그랬다가 보험 coverage에 따라 생각 외의 거금을 물어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닉슨의 HMO 도입에 대한 식코의 일부분)
미국의 의료보험제도에 대한 이러한 상황은 통계를 통해 보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OECD Health Data 2003”을 보면 의료비 중 공공지출의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는 미국으로 44.2%이고 한국이 44.4%로 꼴찌에서 2위입니다. 하지만 의료비에 지출되는 총비용은 미국이 가장 높아 GDP의 13.9%이고, 반면 한국은 가장 적게 지출하는 국가 중 하나 입니다. (GDP의 5.9%로 27위) 즉 미국은 의료비가 너무 비싸서 비용은 제일 많이 들지만 그게 차지하는 비율은 최악에 가깝고 우리나라는 의료비가 싸서 비용도 적게 들지만 비율도 낮은 나라라는 이야기지요.
예전에 fox 뉴스에서 본 내용을 다시 찾아봤는데, 미국에서 가장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 회사는 어디 일까요? 정답은 바로
more..
이 회사가 고용하고 있는 직원의 수는 약 140만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들 중에서 의료보험이 있는 사람은 43%이고, 그것도 1주일에 34시간이상 일하면서 1년이 지나야 본인만 가입이 가능하다는군요(배우자는 불가). 최근에는 이런 뉴스들이 계속 보도되자 월마트에서 점점 개선을 하고 있다는 NPR 뉴스 (음성화일을 들으셔야 합니다)도 있네요.
하지만 식코에서 전혀 언급이 안되어서 반론으로 많이 거론 되는 것처럼 미국에는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같은 노인과 극빈자 층을 위한 의료보험은 존재합니다. 많은 유학생들이 혜택을 보고 있는 제도이지요. 그래서 어중간하게 돈을 버느니 아예 놀면서 조금만 버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도 있는가 봅니다. 아무튼 미국이라는 나라를 꿈의 고향이나 선진국의 대표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반대로 악의 제국으로 보는 사람도 꽤 되는데 과연 미국은 어떠한 나라일까요?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해 제가 느낀 점을 써보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다음으로 넘기겠습니다.
2006년 12월 7일 목요일
엄석대 그 후, 희망은 있는가?
철저한 독재자인 반장 엄석대의 배후에는 그의 `효율적인 통치'에서 득을 보는 담임선생님이 있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5학년에서 6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새로 담임을 맡게 된 교사는 엄석대 식의 강압적인 반 운영을 비판하고 구성원들의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결국 전교 1등의 성적까지 조작하는 엄석대의 음모를 발각해낸 교사에게 매를 맞고 엄석대는 학교를 떠난다. “너희들은 당연한 너희들의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엄석대와 그의 공모자들에게 매를 때리면서 교사가 한 말이다.
여기 유사한 줄거리의 또 하나의 소설이 있다. 황석영. 이문열과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이다. 1972년에 나온 이 소설의 제목은 <아우를 위하여>. 역시 최재봉의 요약이다.
열한 살짜리 주인공 수남의 반에 열다섯 살짜리 영래가 새로 들어오면서 힘으로 반장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다. 가르치는 데에는 뜻이 없고 부업 때문에 밖으로만 나도는 담임선생님은 은근히 영래가 반을 휘어잡는 것을 달가워한다. 그러나 영래의 횡포가 우심해지고, 처음에는 그를 따르던 아이들조차 점차 그에게서 멀어질 무렵, 사범학교 졸업반인 교생 선생님이 부임해 온다. “한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여럿이서 고쳐줘야 해요. 그냥 모른 체하면 모두 다 함께 나쁜 사람들입니다”라는 그의 말에 수남이와 반 아이들은 힘을 합해 폭군 영래를 몰아내기에 이른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두 소설의 얼개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결론이 정반대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마지막 최재봉의 결론이다.
엄석대와 그의 공모자들에게 매를 때리면서 교사가 한 말에서는 앞서 인용한 수남이네 교생 선생님의 말이 겹쳐 들린다. 차이가 있다면 <아우를 위하여>에서는 교생 선생님의 격려를 받은 아이들이 스스로 폭군을 몰아낸 반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교사가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점뿐이다. 두 작품 모두 정치적 알레고리로서의 색채가 뚜렷한데, <아우를 위하여>가 폭군에 맞서는 민중 쪽의 대의에 초점을 맞춘 반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석대가 몰락한 뒤 반 아이들이 보인 행태를 통해 그들의 우중(愚衆)적 면모를 표 나게 드러내고 있다.
(최재봉의 컬럼, “우리들의 진짜 영웅은?” 중에서)
황석영과 이문열. 어느 것이 더 진짜 현실에 가까울까? 난 이문열의 소설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힘센자에게 맞서기 보다는 순응하는 것을 훨씬 보기 쉬운 세상이다. 더욱이 진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허상이었다고 여겨지는 요즘에 말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세상은? 황석영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쉽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렇다. 정점에 몰렸던 권력은 점점 그 영향력이 퍼져가고 있고 민중 또는 대중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어른들이 위아래도 없는 이놈의 세상이 망할 것 같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말이다. 물론 한 때 젊은이들이 꿈꾸었던 꿈, 자유와 희망이 넘쳐흐를 대동 새세상에는 충분히 못 미치지만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시라. 인류의 역사까지 갈 것 없이, 우리의 역사에서 지금처럼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를. 이걸로 만족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언제나 싸움은 이문열(현실)이 이기는 것 같은데 역사의 수레바퀴는 황석영(꿈)쪽으로 굴러오는 것은 사실이다. 희망은 현실이 아닌 현실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영화 쇼생크 탈출을 한 번 더 보시라고 권해주고 싶다. 자유에 대한 희망을 가진 앤디 (팀 로빈스), 감옥의 익숙함에 동화되어 자유를 포기하고 자살한 브룩스, 그 둘 사이에서 앤디의 희망을 선택한 레드 (모건 프리먼)가 앤디와 그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의 “지후아타네호 (Zihuatanejo)”에서 만나는 장면을 말이다.
희망은 우리가 품느냐 버리느냐의 문제이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품는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현실”에 동화되어 있는 사람에게 희망이란 어색한 단어라는 점이다.
바로 그 현실, 이문열이 소설 속에서 현실감 있게 그린 그대로, 엄석대가 사라진 지금 우리의 모습은 완전히 지리멸렬이다. 나눠가진 권력으로 서로 물고 뜯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여와 야가 싸우고, 법원과 검찰이 싸우고, 정치권력과 언론이 싸우고, 친북과 반북이 싸우고, 민중과 우중이 싸운다. 싸움에 진절머리 치는 당신,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것이 현실인 것을. 진정 희망을 잡으려면 그 현실을 넘어서야 하는 것을, 여기서 멈추어선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을, 쉬었다 가더라도 때론 좀 돌아가더라도 진도는 나가야 하는 것을, 말이다.
나에겐 아직도 희망이 있다.
2006년 11월 16일 목요일
그 일본 아저씨는 왜 자살을 시도했을까?
블룸버그 통신의 윌리엄 페섹이라는 컬럼니스트가 쓴 한국 경제에 대한 컬럼이 오늘은 화제가 되었더군요. 제목은”South Korea Faces Risk of Japan-Like Lost Decade”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같은 위험에 대면하다). 내용은 여러 지면에 보도된 바와 같이 90년대 일본의 장기 불황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접 읽으실 분들은 클릭 하시길…)
그리고 제일 중요한 부분은 역시 이 부분. “Perhaps the biggest risk is policy paralysis (아마도 가장 큰 위험은 정책 마비이다).” 잘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페섹이 어제 한국에 왔다고 하거든요. 머니투데이가 인터뷰를 했다는데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공급확대 정책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페섹은 "공급확대는 단기적인 영향을 줄 것이나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금리인상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미국은 부동산값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려 효과를 보고 있으나 한국은 경제의 효율성 문제로 금리인상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유동성을 줄이는 대안으로 고수익 채권발행과 증시 부양을 들었다. 다만, 한국 증시가 경제 펀더멘털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만큼 증시부양의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와 함께 강력한 세제정책을 주문했다. 매도세 등 세금을 인상하면 사람들이 대출을 받아 집을 사지 않고, 임대로 전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문보기는 클릭 하시길…)
헉! “강력한” 세제정책이라니… 그냥 세제정책도 아니고 말이죠. 지금 나온 정도의 세금정책에도 세금 폭탄이 어쩌고 난리부르스를 추는 신문사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더 강력한 세금정책이라… 예전에 스웨덴의 인기그룹 아바 (ABBA)가 소득의 80% 세금 뗀다고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던 생각이 나는군요. 아무튼 요약하면 금리인상은 반대, 공급확대 (단기적으로), 고수익채권발행과 증시부양, 강력한 세제정책이네요. 뭐 현정부의 기조와 크게 다르지는 않아보이는군요. 시민사회권은 좀 섭섭해할지 몰라도.
그런데 1경원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돈의 가치가 자꾸 올라서 몇 조, 몇십 조까지는 들어봤어도 1경원이라고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제 오마이 독자란에 누가 퍼온 2003년 뉴스를 보니까 일본의 부동산 가격이 12년째 연속 하락하며, 무려 1천조엔(우리돈 1경원)의 재산이 거품으로 사라졌다는 군요. 물론 요즘은 경제가 좀 핀다고 하니 좀 올랐나 모르겠네요. 대체 1경원이 얼마랍니까? 그러고 보니 일본을 팔면 미국을 다 살 수 있다고 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군요.
제 경험을 좀 이야기해보면 제가 동경에 살 때 (8년 전쯤) 저희가 살던 원룸 맨션이 한 7평 정도의 크기인데 월세가 7만4천엔 정도였지요. 그 건물주인 아저씨는 그런 맨션 빌딩 몇 개 가지고 월세만 받아도 장난 아닌 돈을 만지는 분이었는데 5층짜리 건물 하나에 한 층에 3개씩 세를 주니까 한달에 백만 엔 이상이 그냥 들어오는 수입이죠.
그런데 저희가 아는 분 중에 그런 아저씨가 한 분 계셨는데 동경 도심에 8층짜리 빌딩을 소유한 분이셨죠. 그런데 샌님들 같은 동경 사람들과는 달리 간사이 출신답게 호탕하고 언제나 시원시원하던 그 아저씨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몇 년 뒤 출장으로 동경을 방문했을 때였답니다. 알고 보니 역시 대출을 받아서 건물을 지었지만 계속 거품이 빠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건물을 다 팔아도 밀린 이자 갚기도 힘든 지경이 되셨다는군요. 결국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많은 빚을 감당하지 못해서 개인파산신청을 해서 살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 안타깝더군요.
물론 현재의 사태가 1차적으로 정부의 잘못이고 거기엔 변명의 여기가 없지만 페섹의 말한 정책 마비(policy paralysis) 상태를 풀기위해 여러 경제 주체들이 힘을 합쳐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죠. 사실 이 부동산 레이스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사람들은 저소득 무주택 서민들보다는 중산층이라고 볼 수 있지요. 서민들이 뭐 몇 억씩 대출이나 받을 수 있습니까? 결국 중산층의 타격은 더 심각한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구요.
얼마전 읽은 드러커의 유작 <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더군요.
“세상에 비합리적인 고객이라는 것은 없다. 있다면 오직 게으른 제조업자뿐이다. 고객의 행동은 항상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건 지금 정부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동산 레이스에 뛰어드는 국민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들을 믿게 만들어 줘야겠지요. 분명 정책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있고 언론들의 본질 호도 등이 있지만 국민을 탓해서는 안됩니다. 노대통령의 명언 아닙니까, “농부가 밭을 탓할 순 없다.”
반대로 그 책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공공기관의 혁신과 관련해서) 공무원에 대한 비난은 아키아벨리 시절부터 불렀던 한물간 노래이다. 좀 더 나은 사람들이 관료가 되면 해결된다는 식의 생각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부를 두들겨 패고 비난하는 것이 속은 좀 시원할지 몰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어떤 정책도 먹혀들지 않는 경우에 말입니다.
이제 새 대책도 나왔으니 부동산 시장이 좀 진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새 정책이 만능은 아닐 것이고 보완할 것은 보완하면서 말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심상정 의원이 주장하는 다주택자 대출 규제는 좀 했으면 좋겠는데). 부동산에 대한 뉴스를 더 이상은 안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도무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성경의 경구가 날로 가슴에 남는 요즘입니다.
* 글 올리려고 보니까 또 모든 언론들에서 페섹의 컬럼을 요리해서 다들 한소리씩 하셨군요. 조선일보의 사설은 가관입니다. 이 정부가 “잘 사는 이웃집에 벼락이 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빌도록 만들었다는군요. (대체 이런 말이 사설에 쓸 말인가요?) 그냥 닥치고 페섹이 하자는대로 강력한 세금정책이나 하자고 하든지!
2006년 10월 13일 금요일
손봉호 vs 노무현
일찌기 한홍구 교수가 말한 "참된 보수"를 지금 세상에서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손봉호 교수을 꼽겠다. 선비적인 풍모와 함께 "철저한 원칙론자"인 그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것 빼고 (하긴 요즘은 예전에 안티조선하던 놈들도 쓰는 판이니) 한국 기독교 지성계에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그가 얼마전 동덕여대 총장에서 해임되었다는 뉴스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땅에 원칙론자가 발붙여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만든 이 사건을 당하며 과연 손봉호 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손봉호 총장의 죄목이라는 것, 그건 바로 이땅의 백성들이 현 대통령에게 붙인 죄목과 99% 동일하다. 언론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면 손총장의 죄목은 "재임 후 학교측과 총학생회, 교직원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독단적으로 학교를 운영"해왔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회 갈등 심화, 독단적 운영,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그런데 그 갈등이라고 하는 것이, 총학의 부정선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5명 밖에 되지않는 교수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정 반대편의 과거 재단이사장측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부풀려지고 방관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양 갈등 당사자들의 사이에서 원칙을 지켜보려던 교육자의 파면이 현 대통령의 탄핵사태와 겹쳐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지금 손총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난 그게 제일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또는 이 땅에서 원칙론자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2006년 8월 11일 금요일
두 얼굴의 교육에 대해...
아래 퍼온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우리 교육이 문제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해법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반대의 생각들이 섞여있는 경우를 종종본다. 마치 현정권의 외교가 문제라고 하지만 한쪽에서는 너무 친미라고 하고 반대쪽에서는 반미라고 하듯이 말이다. 언제나 이 두 극단은 상호절충을 모르고 그 상위 권위인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믿듯이 교육에 있어서도 그 두 얼굴이 뚜렸하다.
미국의 교육을 칭송하는 부류들이 가장 내세우는 점은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지옥과 같은 공부와 과외등을 안하거나 덜해도 된다는 점이다. 그저 남(주로 미국인)보다 조금 더해도 좋은 성적을 올리니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적고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논리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와 과외를 안하거나 덜해도 되게 만든 정책이 바로 현재의 정책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학생들의 학력이 낮다느니 이런 소리가 나오고 나보다 공부못하는 애들이 서울대를 가게된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공부잘하는 순서대로 입시사정표의 학력고사 커트라인 순서에 맞게 가야지 3등한 나는 한양대가고 4등한 놈이 서울대가는 꼴은 못보는 것이 아닐까?
즉 그 두얼굴이란 내아이가 공부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좀 행복했으면하는 심리와 그래도 공부잘하는 놈부터 순서대로 서울대를 가야한다는 입시위주의 심리가 상충된다는 것이다. 물론 중압감없이 행복하게 공부해서 서열별로 대학가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 서열이 완화되지 않는 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어디서나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적어도 대한민국의 10개 또는 그 이상의 대학 졸업장이 거의 동등하게 대우받지 않는 한, 그 서열이 살아있는데 입시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고 입시가 우선되면 교육이 정상화될 수 없다... 는 것이 얼마전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눈 다음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2005년 10월 14일 금요일
강정구교수 사건을 보며 <공동경비구역 JSA>를 생각하다
JSA는 진실에 관한 영화다. 여기엔 서로 다른 진실이 있다. 서로 다른 진실이라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이지만 아무튼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보는 남과 북이 있다. 그리고 진실은? 그 가운데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진실이 아니다.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인물, 소피 장 이영애는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한 자의 딸이다. <광장>의 이명준의 딸이라고나 할까. 왜냐면 어차피 한쪽에 속한다면 진실은 한쪽만의 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쪽도 저쪽도 아니기 때문에 중립적인 것이 아니고 양쪽의 적이다. 이것이 우리 비극의 시작이다. 진실을 대할 용기가 우리에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면 적이다.
착실하게 진실에 접근하던 소피 장은 결국 아버지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사건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유엔군 상관을 통해 이 나라에 대한 다른 진실을 듣는다. 그 진실은 무엇인가. 그건 “진실이 숨겨져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 한반도라는 사실이다. 그건 한 사진 속에 실재했던 이수혁, 오경필, 남성식, 정우진, 이 네 사내가 만들어낸 사건의 진실보다 더 상위의 진실이다.
우리는 흔히 일본인들을 위선적이라고 한다. 다분히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퍼뜨린 혼네(본심)와 다테마에(겉마음)라는 예를 들어 말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말한다. 한국인들은 직선적이고 솔직하다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건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 주로 그렇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한국인들이 더 위선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무슨 한국인을 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살아본 내 경험으로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대단한 나라다. 가진 것 없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좀 자랑할 만 하다. 솔직히 이젠 외국에 나가도 크게 꿀리거나 그들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지거나 이런 것 그다지 많지 않다.
▲ 1인 시위를 벌이는 시민
ⓒ2005 오마이뉴스 김덕련
교육이나 의료제도도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미국이 나을지 모르나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한국이 결코 못하지 않다. 이건 한국에 사는 사람만 잘 모르는 사실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으니 아직까지도 우린 사회적인 위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에 못지않은 법은 있지만 무용지물이다. 국회엔 윤리위원회가 있지만 아무도 징계 받지 않는다. 탈세범이 한국에서 사업하는 놈 중에 탈세 안 하는 놈 있냐고 큰소리친다. 법대로 영업하는 신문사도 없고 연구비 안 떼어먹는 교수도 별로 없다.
영화 <투캅스>에 보면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신참 형사 박중훈이 비리형사 안성기에 열받아 법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인다. 그랬더니 경찰서가 완전히 포화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대충 대충 사람 봐가며 해야 한다.
이게 우리사회를 살아가는 지혜이며 진실이다. 그러니 주로 걸리는 건 미운놈이고 그러니 언제나 음모론이다. 진실은 상황에 따라 해석되며 신뢰 수준은 낮고 약점 은폐형 문화가 기승이다.
법무장관이 검찰총장에게 “사상 최초”로 지휘권을 발동한 것도 그렇다. 우린 다 알고 있다. 과거엔 검찰총장이 지휘를 받은 정도가 아니라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가 난 것처럼 호들갑이신가들! 그냥 지휘권 발동하지 말고 조용히 불러 나중에 한자리 준다고 구슬리거나 도청이라도 해서 약점 잡아 시켜야 좋겠는가?
난 이번 일을 보고 오히려 즐거웠다. 그건 강정구 교수의 의견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천정배 장관이 법에 정해진 자기의 권리에 따라 일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보안법 적용해서 수사해라 마라 이런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인신구속 여부에 대한 지휘를 한 것이다. 법에 정해진 권한인데 대체 뭐가 문제인가. 문제 있으면 검찰이 계속 수사하면 될 일이지.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속사보다 침착하고 냉철한 상황판단이 중요함을 오경필에게 배운 이수혁은 바로 그 침착해야 할 상황에서 오경필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다행히(?) 총알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둘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평화 유지를 위해 진실을 숨겨두고 떠나는 소피 장에게 진실을 고백한 이수혁은 결국 자신에게 총알을 박는다. 어쩌면 그건 진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느 독특한(?) 학자의 주장을 감옥에 집어넣어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진실을 감당할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조갑제, 김용서, 한승조 등등의 그 많은 반정부, 반민족 발언에 그랬듯이 대범할 수는 없는 것일까?
끝으로 강정구 교수의 주장에 대한 의견은 노하우21 김창환님의 주옥같은 글 한 구절 인용하고 마치련다.
“입으로는 미국은 상종 못할 학살자로 믿는 아버지마저도 미국에서 교육 받도록 안식년 때 아들을 미국에 데려가는 이 현실. 이 얼마나 훌륭한 자유경쟁 시장의 작동에 대한 증거입니까. (중략) 그런 아버지 밑에서 평생을 자라도 충실한 자유경쟁 사회의 일원이 되는데, 이 일단의 무리들은 수업하나 들으면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위험인물이 된다고 공상을 한다는군요.”
자신감을 가져라! 대한민국이여!
2000년 3월 1일 수요일
<한겨레 과학>을 만들자
'과학 기술'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되고 있다. 어린이들 상당수의 꿈은 과학자다. "나는, 나는 될 터이다. 육군 대장이 될 터이다" 이런 노래를 군사정부가 끝난 지금도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장군이나 대통령에서 많이 바뀌었다. 대학과 대학원 정원도 압도적으로 "이공계"가 많고 더 많아 질 것이라고 한다. 덕분에 박사들은 넘치고 넘쳐 사법시험과 변리사시험을 보기에 이르렀을 지경이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생활과학, 게다가 어디든 과학을 붙여야 폼이 나고 학문다운 느낌이 드는 세상이다. 그 어느 누구도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주역에서 과학기술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리 과학기술이 강조되고 있을까. 그건 바로 돈이 되기 때문, 다시 말하자면 과학과 경제의 결합 때문이다.
신문을 잘 보면 그 속에 답이 있다. 최근 신문의 섹션화 붐 속에 과학기술 기사는 어디에 자릴 잡고 있는가. 거의 모든 신문에서 과학기술은 <정보통신>면에 위치한다. 과학기술면 속에 정보통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 한겨레를 보자. <정보통신>은 정치 경제 사회 등등 계속 밀려 나가다가 마지막 '만화'의 앞이다. 게다가 <정보통신> 페이지 속에 들어가 보면 '과학'은 컴퓨터, 인터넷, 이동통신, 등등 8개 항목의 맨 마지막이다. 이건 정확히 한국 사회에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일치한다. 우리 나라만의 독특한 과학에 대한 정의, 즉 돈이 되지 않는 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돈이 되는 한에서는 과학기술이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생각해도 좋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관련 기사가 위치하는 두 번째 장소는 어딜까? 재미있게도 그건 <국제>면이다. 그리고 <국제>면의 과학기사 보도는 대게 외국 언론기관의 보도를 '받아서' 하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나라 과학기술 수준과 연관성을 갖는 부분인데 그만큼 과학기술은 해외, 선진국, 돈 많은 나라 편향적이다. 며칠 전 신문에 영국에서 knock-out 돼지(특정 유전자를 망가뜨려 원하는 유전형의 동물을 만드는 기술)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 연구에는 많은 투자와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돈은 돈 없고 힘없는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재미있는 예로 '전세계' 말라리아 치료 및 예방에 관련된 연구비의 총액이 97년 암 치료제 개발과 관련해서 '영국에서만' 쓴 돈의 절반 수준이었다고 한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아픈 병은 상품성도 없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 나라 탤런트 한 명도 비명에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마지막 과학기술 관련 기사의 자리는 <문화생활>면이다. 특히 의료, 건강, 식품, 미용, 최근엔 다이어트 등이 그렇다.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이면서도 사실 우리 생활과 아주 밀접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고한 학문의 울타리 속에 있는 학자들은 이런 '세속적' 내용을 멀리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기사는 상당 부분 선정적이 아니면 장삿속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상의 예를 들어 '어느 학회에서 모 교수가 콩을 먹으면 암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고 했을 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일지라도 그 속에 여러 가지 커넥션들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에 관한 기사들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가장 바람직한 것은 <과학기술> 자체의 섹션이 마련되는 것이겠지만, 과학기술관련 기사들은 원칙적으로 신문이라는 매체에 크게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방송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프로그램은 뉴스보다 다큐멘터리에 어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활자 매체에 있어서는 신문보다는 잡지에 더욱 어울린다. 게다가 무엇보다 전문성이라는 견고한 벽을 갖고 있는 과학기술을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하고 이해하는데는 신문이라는 제한된 지면보다 좀 더 많은 매수의 원고와 설명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변이 없는 발전은 한순간 반짝하는 붐에 그치기 십상이다. 여자 장관을 몇 % 할당한다고 해서 여성인권 수준이 높아지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여성 실 국장이 늘어나고 공무원에 여성비율이 더 늘어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학 기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 인간의 지위와 삶을 지배하는 위치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무지하고 너무 무관심하다. 인터넷의 세상, 생물 복제의 세상, 우주여행의 세상, 무병장수의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어느 날 눈 떠보니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좀 더 알아야 하고 우리의 과학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나는 <한겨레과학>이 창간되어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한국 과학기술의 현실을 알리고 과학기술에 대한 담론들과 한국 과학기술의 대중화와 민주화, 그리고 그를 통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귀사는 <한겨레과학>의 창간을 검토할 의향은 없는지. 아마 별로 돈이 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한겨레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가,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은가.
1998년 5월 19일 화요일
과학기술문화와 대중 매체
작가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쓴다. 비디오를 이용한 미술 작품이 나오는가 하면 하나의 전자악기가 오케스트라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각 종 통신 수단 광고가 과잉현상을 보이고 있다. 운동과 스포츠는 과학만능주의를 선언한 지 오래다. 예술 문화 부분만 그러한가. 인류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던 인문학도 인문'과학'으로 과학에 스스로 흡수통합되어 버렸다. 사회과학, 교육과학, 생활과학 등등, 이제 '과학'은 모든 학문에 붙는 공통적인 접미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게다가 국가에 경제위기가 닥쳐오니 모두가 과학기술에 희망을 걸고 있다. 어려운 경제위기를 풀기위해서는 외화의 획득이 필요하고 결국 외화획득에는 신기술에 의한 수출 증대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벤처기업 1만개를 육성하고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한다는 '특혜'까지 주어가며 과학기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라는 낱말은 일반인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 낱말을 머리로 생각하거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그만큼 대중들과 가깝다는 말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람들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97년을 요약해서 인류 역사책에 한 줄로 적는다면 아마 복제양 '돌리'가 그 주인공이 될 것이다. 언감생심 조그만 양 한 마리가 사람의 역사에 주인공이 된것도 모자라, 이제는 새끼까지 낳았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우리귀에 들렸다. 하지만 '돌리'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 곁에 왔던가. 그렇지 않다. 이미 인류는 생식 세포를 이용한 수정란 분할 방법으로 복제 개구리(1952년), 복제 생쥐(1983년), 복제 송아지(1990년)를 만들어낸 전력이 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그러한 복제 기술의 발달에 대해 알지 못하였던가. 그리고 어느 날 나타난 어린 양 '돌리'에게 경악하고 또한 박수를 보내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과학기술이 일반 대중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과학기술문화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의 의식과 과학기술을 연결시켜 주는가. 바로 그것이 글자 그대로 매체(媒體, media)다. 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실상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1997년 2월 27일자 <네이처(Nature)>지를 사지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돌리'는 전세계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양이 되었을까? 그것이 바로 대중 매체의 힘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각 종 대중 매체의 발전을 급속하게 촉진시켰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고대시대의 책에서 언론과 방송으로,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통신과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각종 대중 매체의 발달은, 금속활자가 위대한 발명품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각종 인쇄기구, 통신 장비등의 발달에 크게 힘입었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이렇게 과학기술에 빚만 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서 과학기술도 대중 매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개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지식을 학술지를 통해 인정받고 공급받는다. 그러나 이런 학술지에 쓰이는 언어는 일반 대중이 쓰는 언어와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때문에 해석이 필요해졌다. 대중 매체가 바로 여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대중 매체에 의한 과학기술의 보도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에서 과학기술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정확한 사실 보도의 부재와 전망의 확대해석으로 인한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이다. 사실보도를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외국 언론의 무분별한 인용보도와 전문학술지를 읽어내는 능력의 부족을 들 수 있겠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1년 전만 해도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DHEA(dihydroepiandrosteron)의 경우가 그렇다. 96년 말 <뉴스위크>의 보도를 계기로 갑자기 불어온 DHEA는 남성에서는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으로,여성에서는 에스트로젠(esterogen)으로 바뀌는 전구물질(precursor)로서 몸안을 순환하는 가장 흔한 스테로이드 물질인데, 당시 한동안 정력제에서부터 항노화제, 항암제,심지어 만병통치약으로 취급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1995년 1월 7일 프랑스 유력 시사주간지인 '르 포엥'에서 프랑스국립보건연구소 에티엔느 에밀 볼리외 교수팀에 의해 DHEA의 효능이 밝혀졌음을 커버 스토리로 다룬바 있다. 결국 한 때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 과학기술 보도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예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학술 논문은 자신의 가설과 그것을 입증하는 결과들(results)로 나타난다. 때문에 이 결과들을 통해 연구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었는지를 가려내는 것이 논문을 읽어내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비전공자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여기에 있다. 논문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생략한채 몇몇 단어를 직역하다보면 엉뚱한 내용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지껏 수도 없이 개발되었다는 항암제에 대한 보도의 대부분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그 실험이 생체(in vivo) 실험인지 체외(in vitro) 실험인지, 사람 대상인지 쥐나 토끼의 대상실험인지, 전임상단계의 결과인지 임상 몇 상의 결과인지 등등, 오히려 연구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정보들은 다 생략되거나 간단하게 압축하고 '획기적 치료제 개발' 따위의 제목을 붙이는 등의 행태는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라고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보도에 있어서는 정확한 사실의 보도와 조심스런 전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끝으로 '대중에게 꼭 과학기술을 알려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본격적인 '기술관료(technocrat)'의 시대가 도래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미 과학기술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직, 간접적인 영행을 주고 있는 판국에, 사실상 대중들은 아무런 발언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기술분야는 다른 분야와 달리 전문가만이 다룰 수 있는 분야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은 '전문가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을 극복하는 방안이 바로 '대중화'를 통한 과학기술문화의 확립이다. 배타적인 전문가 집단에서 열린 전문가 집단으로, 소수를 위한 과학기술에서 다수를 위한 과학기술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오는 지름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