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14일 금요일

강정구교수 사건을 보며 <공동경비구역 JSA>를 생각하다

강정구 교수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거기에 사상 최초라는 법무장관의 지휘권 발동과 이에 반발하는 소위 보수세력들의 싸움이 계속된다. 그 와중에 나는 혼란스럽다. 그리고 생각났다. 그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JSA는 진실에 관한 영화다. 여기엔 서로 다른 진실이 있다. 서로 다른 진실이라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이지만 아무튼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보는 남과 북이 있다. 그리고 진실은? 그 가운데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진실이 아니다.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인물, 소피 장 이영애는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한 자의 딸이다. <광장>의 이명준의 딸이라고나 할까. 왜냐면 어차피 한쪽에 속한다면 진실은 한쪽만의 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쪽도 저쪽도 아니기 때문에 중립적인 것이 아니고 양쪽의 적이다. 이것이 우리 비극의 시작이다. 진실을 대할 용기가 우리에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면 적이다.


착실하게 진실에 접근하던 소피 장은 결국 아버지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사건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유엔군 상관을 통해 이 나라에 대한 다른 진실을 듣는다. 그 진실은 무엇인가. 그건 “진실이 숨겨져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 한반도라는 사실이다. 그건 한 사진 속에 실재했던 이수혁, 오경필, 남성식, 정우진, 이 네 사내가 만들어낸 사건의 진실보다 더 상위의 진실이다.


우리는 흔히 일본인들을 위선적이라고 한다. 다분히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퍼뜨린 혼네(본심)와 다테마에(겉마음)라는 예를 들어 말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말한다. 한국인들은 직선적이고 솔직하다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건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 주로 그렇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한국인들이 더 위선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 1인 시위를 벌이는 시민
ⓒ2005 오마이뉴스 김덕련
무슨 한국인을 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살아본 내 경험으로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대단한 나라다. 가진 것 없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좀 자랑할 만 하다. 솔직히 이젠 외국에 나가도 크게 꿀리거나 그들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지거나 이런 것 그다지 많지 않다.


교육이나 의료제도도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미국이 나을지 모르나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한국이 결코 못하지 않다. 이건 한국에 사는 사람만 잘 모르는 사실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으니 아직까지도 우린 사회적인 위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에 못지않은 법은 있지만 무용지물이다. 국회엔 윤리위원회가 있지만 아무도 징계 받지 않는다. 탈세범이 한국에서 사업하는 놈 중에 탈세 안 하는 놈 있냐고 큰소리친다. 법대로 영업하는 신문사도 없고 연구비 안 떼어먹는 교수도 별로 없다.


영화 <투캅스>에 보면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신참 형사 박중훈이 비리형사 안성기에 열받아 법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인다. 그랬더니 경찰서가 완전히 포화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대충 대충 사람 봐가며 해야 한다.


이게 우리사회를 살아가는 지혜이며 진실이다. 그러니 주로 걸리는 건 미운놈이고 그러니 언제나 음모론이다. 진실은 상황에 따라 해석되며 신뢰 수준은 낮고 약점 은폐형 문화가 기승이다.


법무장관이 검찰총장에게 “사상 최초”로 지휘권을 발동한 것도 그렇다. 우린 다 알고 있다. 과거엔 검찰총장이 지휘를 받은 정도가 아니라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가 난 것처럼 호들갑이신가들! 그냥 지휘권 발동하지 말고 조용히 불러 나중에 한자리 준다고 구슬리거나 도청이라도 해서 약점 잡아 시켜야 좋겠는가?


난 이번 일을 보고 오히려 즐거웠다. 그건 강정구 교수의 의견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천정배 장관이 법에 정해진 자기의 권리에 따라 일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보안법 적용해서 수사해라 마라 이런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인신구속 여부에 대한 지휘를 한 것이다. 법에 정해진 권한인데 대체 뭐가 문제인가. 문제 있으면 검찰이 계속 수사하면 될 일이지.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속사보다 침착하고 냉철한 상황판단이 중요함을 오경필에게 배운 이수혁은 바로 그 침착해야 할 상황에서 오경필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다행히(?) 총알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둘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평화 유지를 위해 진실을 숨겨두고 떠나는 소피 장에게 진실을 고백한 이수혁은 결국 자신에게 총알을 박는다. 어쩌면 그건 진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느 독특한(?) 학자의 주장을 감옥에 집어넣어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진실을 감당할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조갑제, 김용서, 한승조 등등의 그 많은 반정부, 반민족 발언에 그랬듯이 대범할 수는 없는 것일까?    


끝으로 강정구 교수의 주장에 대한 의견은 노하우21 김창환님의 주옥같은 글 한 구절 인용하고 마치련다.


“입으로는 미국은 상종 못할 학살자로 믿는 아버지마저도 미국에서 교육 받도록 안식년 때 아들을 미국에 데려가는 이 현실. 이 얼마나 훌륭한 자유경쟁 시장의 작동에 대한 증거입니까. (중략) 그런 아버지 밑에서 평생을 자라도 충실한 자유경쟁 사회의 일원이 되는데, 이 일단의 무리들은 수업하나 들으면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위험인물이 된다고 공상을 한다는군요.” 


자신감을 가져라! 대한민국이여!

2005년 3월 9일 수요일

하루하루에 주의 선하심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만든 노래가 음반에 수록 되어서 나왔다. 언젠가 누가 음반만든다고 저작권료 어쩌고 하길래 뭐 하나님일 하는 거니까 필요없다고 했는데 아마 그 음반이 나왔나 보다. 나도 몰랐는데 나도 모르는 사람이 메일을 보내왔다. 좋은 노래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ㅎㅎㅎ

뭐 일종의 컴필레이션 앨범이니까 대단 한 것은 아니지만 앨범 이름이 <축복의 통로>라고 한다. 축복과 교제에 관한 찬양 16곡을 모은 앨범이다. 작년 10월말에 나왔다는데 판매 순위가 10위 안에 드는 것을 보면 그래도 실패작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좋은 노래가 많다는 뜻이지...^^)

이 곡은 내가 죠이 대학부 회장으로 섬길 때 만든 곳이다. 당시 죠이 대학부 임원, 연기연 사역, 대학원 진학 준비(라고는 솔직히 한 것이 없지만)등으로 너무 바쁘게 살고 있을 때 죠이 부회장이었던 은주 누나가 내게 많은 격려 편지를 보내주었고 그래서 그 은혜에 보답코자 생일 선물로 만들어 준 곡이다. 작사가 김은주라고 되어있는 것은 누나가 내게 보내준 편지의 내용을 추스려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다가 우연히(?) <많은 물소리> 제작을 죠이대학부에서 돕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이 곡이 그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가사의 뼈대는 빌립보서 1장 9절-10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는 말씀이다.

아무튼 이 곡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의 말인 것 같다. 죠이에선 그래도 꽤 불린 곡인 것 같은데 가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이 곡을 알고 있을 때는 기분이 참 묘하다.

내가 만든 곡이지만 저작권 관계로 전곡을 다 들을 수 없다.^^ 그나마 중요부분만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데... 즐감하시길...

(세상에 이 노래를 도토리를 주고 살 수 있다니...ㅎㅎㅎ 배경음악으로 나오므로 정말 즐감하시길!!! 나레이션은 좀 그렇다...)

하루 하루에 주의 선하심이 당신에게 끊임없고 영원하기를
주님의 날까지 당신 인격이 진실하여 허물없이 이르기를
지식과 총명이 풍성해 지기를
당신이 주님의 선대하심을 보기를
축복합니다. 당신의 좋은 날
축복합니다. 주님 사랑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2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립보서 1장 9절-10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시편 119:65)

2005년 2월 4일 금요일

산동네-삼양동에서

오늘 우리교회분이 알려준
신경림시인의 시집 <길>(1990) 에 수록된 시.

이로서 삼양동이 나온 문학작품은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청준의 <낮은데로 임하소서>
그리고 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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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삼양동에서

집에서는 왕자처럼 살고
나와서는 잡초로 행세하는 자들이 싫어서
일년 내내 동네 밖을 안 나가는
딸기코 대서방 서사는 내 바둑동무다
남 앞에서는 옳은 소리만 하고
전문지식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면서
자기 자식들은 몰래
외국으로 빼돌려 공부시키는 자들이 미워
신문도 방송도 안 본다는
허리 굽은 양복점 주인은 내 술동무다
한 스무 해 징역을 살고 나와보니
온잡 잡짓으로 돈벌고
또 여편네 앞장세워 출세한 것들이
투사가 되고 지사가 된 세상이 어이없어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지만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보는 줄 알지만
아아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눈도 코도 없는 줄 알지만......

2004년 3월 7일 일요일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통하였느냐..." (나와 우리의 소통에 대하여)

"통하였느냐..." (나와 우리의 소통에 대하여)

간만에 시간을 내서 영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Lost in translation)>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고른 첫번째 이유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2003년 헐리웃을 가로지른 <매트릭스>, <킬빌>, <라스트 사무라이> 등을 보면서 최근 헐리웃에서 왜 그렇게 일본에 관심을 가지는지가 궁금했었습니다. 두번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1순위라던 빌 머레이의 연기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숀 펜에게 상을 빼았기자(?) 사회자 빌리 크리스탈이 “Don’t go, Bill, We all love you!”라고 했던 말이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세번째는 아마도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각본상을 휩쓴(반지의 제왕이 후보에 없었으니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가 감독을 했다는 호기심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영화였습니다.

평론가들에게 평균 별 넷을 받은 영화답게 약간은 지루한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감히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루한 여백을 나름대로 잘 메워줄 화두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화두는 바로 ‘소통’입니다. 이 영화는 소통을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 그거였구나’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 다시 한 번 보면 더 그 의미가 명확해지는 영화를 오랜 만에 만났습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소통이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일단 언어가 다른 물리적인 공간, 일본에 1주일 머무는 사람들 입니다. 소통의 방식이 다른 곳에 온 것입니다. 전세계에서(아마 잘 사는 나라 중에 그렇다는 거겠죠) 영어가 제일 안통한다는 바로 그 나라 말입니다. 영화는 계속 영어와 일어가 전혀 맞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줍니다. CF감독의 무수한 말을 한 줄로 설명해내는 통역이나, 병원에서 질문에 상관없이 일본어로 열심히 설명해주는 자원봉사자의 모습은 뜨악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언어가 같다고 소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소통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혼 25년을 맞은 빌 머레이는 아내와 소통이 안되고, 이제 결혼 2년된 스칼렛 죠핸슨도 남편과 도대체 소통이 안됩니다. 빌 머레이의 아내는 시차가 정반대인 일본을 생각못하고 남편이 자는 시간에 팩스를 보내옵니다, 관심도 다릅니다. 카페트 색깔을 어떻게 할까에 대해 그는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스칼렛 죠핸슨의 남편은 너무 일에 바빠 자기 아내를 혼자두기 일 수 입니다. 같은 영어를 써도 대화가 겉돕니다. 그러니 밤마다 호텔 바에 나와서 혼자 위스키나 마실 밖에요.

그러다 둘은 우연히 합석을 하고 서로를 알게 됩니다. 여기가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갈라지는 지점인데 <러브 어페어>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는 달리 이 영화는 이 둘이 서로 좋아하게 되는 것인지 사랑에 빠지는 것인지조차 애매합니다. 마지막 귓속말을 관객에게 들려주지조차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둘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서로 통했다는 거죠. “통하였느냐”라는 광고 카피는 이 영화에 사용됐어야 했습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정체불명의 제목은 그만두고 말이지요.

제가 말끝, 또는 글끝마다 조선일보에 대해 타박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문제)가 우리사회의 의사소통의 통로를 근본적으로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최근 한국 사회의 분열(?)에 대한 우려의 근본에 바로 이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일보에서는 마치 이 문제를 일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준동으로 왜곡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정치뿐만이 아니라 사회, 교육, 문화, 종교 전반에 걸친 소통의 메커니즘 문제입니다.

그 일례로 노무현 대통령이 잘못했다는 그 ‘부적절한 언사’들의 대부분을 직접 동영상으로 거의 빠짐없이 보고 들은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부적절한 언사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이 신문 기사화 되면 아주 요상하게 바뀌어 버립니다. 전혀 주제와 상관없는 하나의 발언이 문제가 되고 논쟁이 됩니다. 아직도 대통령이 가장 잘못했다는 것이 그 어떤 정책적인 것도 아닌 ‘언사’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소통의 통로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소통은 어렵습니다. 소통은 말이 통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 안통한다고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영화에서 가장 지루한 장면이었던 일본 재즈연주자들과의 술집 장면이나 가라오케 장면은 말은 잘 안통하지만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완전한 소통을 나타내지는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말이죠.

이 영화를 보다가 <공동경비구역 JSA>가 생각났습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어느 면에서 소통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종반에 끝까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이영애에게 유엔군 장군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판문점은 진실을 감춤으로서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게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관통하는 소통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소통되지 않으면서 소통한 척 하는 것, 또는 거짓으로 소통하는 것 말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월간조선과 인터뷰한 기사 제목이 “순진한 휴머니즘으로 남북 분계선을 넘으면 인생이 박살난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여서 곤욕을 치룬 적이 있습니다. 하도 어이없는 질문만 하길래 농담 삼아 한 단 한마디가 제목이 되었답니다. 이게 그네들의 방식입니다.^^)

기자들이 대통령을 데려다 어느 당을 지지하냐 지지할거냐 물어놓고 우리당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더니 탄핵을 하겠답니다. 정범구 의원이 고백했듯이 과거 대통령들이 소위 유명인사들을 독대하고, 선거에 나가라고 해서 공천주고, 자기 국회의원 만들었어도 아무 문제 삼지 않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결국 대통령이 누구를 지지할 지 누구나 다 알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그들이 원하는 소통 방식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제 그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게시판에서, 그리고 블로그에서 과거에 감추어졌던 개인의 생각들이 수도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매개체(미디어)를 통하지 않고 이젠 직접 소통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받아 들이느냐 아니냐,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존중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사회적인 측면이 아니고 개인적인 측면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외국에 살면서 사람들이 받는 최고의 괴로움이 바로 이 ‘말’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받는 상처의 대부분도 바로 이 ‘말’ 때문이구요. 뭐 모국어가 없는 세상에 사는 괴로움이야 북한에 갔다가 독일에서 생활하던 황석영씨가 구속을 각오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말’이 소통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나 선교단체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나 소위 뒷다마까는 것 문제다라고 하지만 결국 저만 봐도 자기 이야기보다는 남 이야기를 더 하는 듯합니다. 문제는 외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상태에서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더 강하다는 것이죠. 연고주의 나라 대한민국의 초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참 친한 것 같으면서도 “정말 저 사람이 나를 신뢰하나?”하는 느낌들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애기 때문에 교회 구역예배 참석도 어렵고 사람들과 대화할 시간 조차 내기 어려울 때는 더욱 그런 것도 같구요.

공간적, 시간적, 심정적 제약으로 소통이 안되는 사람 둘이 만나 '통하는' 영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Lost in translation)>이 좋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생각들을 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죠. 아무튼 제대로 소통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게시판에 이런 글을 끄적거리는 이유도 그때문이니까 말입니다.

2004년 1월 13일 화요일

반지의 제왕

그 유명한 반지의 제왕을 보다. 1편 부터 3편까지 약 3번씩 보았으니까 3시간씩만 잡아도 27시간을 본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앉아서 본 것은 아니고 애기 안고 트름 시키면서도 보고 밥먹고 잠깐 쉴 때도 보고, 하은이랑 놀면서도 보고 했기 때문에 3번씩 보게 되었다. 이제야 줄거리와 등장인물이 대충 한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나는 다분히 줄거리 중심적인 사람이라(일하는 것도 그렇다) 드라마를 안보는 데, 그 이유가 한 번 빠지면 자꾸 몰입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이렇게 한번에 몰아쳐서 보는 것을 더 선호한다. 아무튼 해적판으로 보는 것으로는 성이 안차서 극장에 가서 3편(왕의 귀환)을 보고 왔더니  맘이 좋다. 역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그러려면 애봐주는 극장이 많이 생겨야 할텐데… (대전의 한 극장에는 그런 시설이 있었다) 암튼 덕분에 미국와서 극장엘 다 가봤다.

잠시 동안이나마 반지의 제왕에 내가 빠진 이유는 뭘까? 아마 그건 반지를 버리는 영화였기 때문이리라. <매트릭스>를 일본 애니메이션의 계보로 풀기도 하고 양자역학으로 풀기도 하듯이,  <반지의 제왕>도 보는 사람에 따라 <스타 워즈>와 대칭되는 SF 환타지이기도, <코난>과 같은 무협 활극이기도 하다. 내용으로 보자면 주인공 프로도의 충직한 정원사 샘 와이즈 갬지의 성장영화이기도 하고 어느 인터뷰를 보니 드물게 동성애적 코드의 영화라고도 하나 보다. 그러나 아무튼 내게 이 영화가 가장 색다른 영화인 것은 이 영화가 반지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 아니고 반지를 버리러 가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는 아마 우리 랩의 미국인 친구가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이 유명한 기독교 소설가인, 그러나 솔직히 이름 말고는 아는 게 없는, CS 루이스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요즘 노래 부르는 재미가 쏠쏠한 우리 큰 딸이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을 내 주위에서 들려준다는 것하고.

아무튼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이 영화가 소위 ‘절대 반지’를 찾으러 떠나는 영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왠걸, 내용은 그 반대로 악의 손에 들어가면 안되는 그 반지를 악의 소굴 한 복판에 가서 내던지고 오는 영화였다.

누구나 손에 넣기를 원하고 손에 넣으면 소유하려는 그 반지는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 ‘권력욕’일 수도 있고 현대 사회의 우상인 ‘경제력’일 수도 있고 조금 다른 종교적 버전으로는 ‘과학기술’일 수도, 혹은 또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인간, 또는 이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어디 한 두개라야 말이지…

아무튼 재미있는 것은 이 반지를 버리기 위해 선택된 사람(?)은 다름아닌 호빗이라는 점이다. 죽었다 살아나는 대마법사 간달프도 아니고, 용맹스러운 인간 아라곤도 아니고, 요정인 엘프도 아니다. 가장 작고(원작에 따르면 키 70cm정도) 보잘것 없는,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도 아닌, 그러나 음주 가무를 즐기고 언제나 낙천적인 존재인 호빗이 반지의 운반자다. 왜 그럴까? 뭐 작가가 재미로 그랬다면 할말 없지만, 어쩌면 기독교적인 사상에 정통한 작가가 호빗을 택한 이유는 그들이 가장 욕심없고 평화로운 세상 샤이어를 이룬 존재들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천국은 바로 그런자들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뭔가를 소유하면, 이라는 조건절로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행복은 만족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지 만족할 조건을 달성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자족이라는 것이 나의 수준에만 머물지 말고 우리의 수준으로 확대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나에게 반지는 무엇일까…

반지의 제왕을 꼭 책으로 한 번 읽고 싶다. 영어책 말고…^^


[덧붙여] 좋은 한해, 평안가운데 보내시기 바랍니다.
 

2003년 12월 13일 토요일

이승엽 파동을 보고 - 시스템을 받치는 인프라의 중요성

보스톤 vs 양키스 이야기에 이은 두 번째 야구 이야기입니다. 올 겨울 스토브 리그의 최대 관심사인 이승엽 선수가 일본 퍼시픽리그로 진출한다는군요. 메이저리그를 향해 달려가 봤지만 올 시즌 홈런 56개로 아시아 신기록(?)까지 세운 선수에 대한 대접이 영 시원찮나 봅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도 자존심 팍팍 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자존심 상할 일일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그 전에 한가지! 저는 이승엽 선수에 대한 평가나 예측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야구가 아무리 데이터의 게임이라고 해도 예측이라는 것은 점치는 것과 같아서 틀리기 일쑤입니다. 뒤돌아보면 누군가 맞춘 이가 있기는 해도 말입니다. 한 예로 이찌로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무렵 NHK에서 이찌로에 대한 특별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마지막 순서는 이찌로가 MLB에 가서 어느 정도 실력발휘를 할 수 있을지 야구평론가, 현역 야구 감독(요꼬하마의 곤도 감독), 연예인들이 예측을 하는 것이었는데 야구 전문가들은 대부분 2할 8푼 내지는 잘해야 3할 정도 할 것이라고 한 반면 연예인 중 하나는 3할 3푼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해 이찌로는 3할 5푼으로 MLB 사상 두 번째 신인왕과 시즌 MVP를 동시에 수상합니다. 어처구니없게 연예인의 예측이 실제 결과에 가장 근접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승엽 선수에 대한 평가나 예측이 아닌 그 이면을 좀 보자는 겁니다.

왜 미국넘들이 우리 야구를 인정 안해 줄까요. 그건 인정할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MLB에서 일본 야구는 상당히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일본의 야구 스타들이 MLB에 와서 예상을 뛰어넘는 호성적을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의 야구 스타에 대한 평가는 박합니다. 성공사례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재목을 데려가 키워서 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다고 봅니다. 야구에 있어선 대한민국 최강 학번이라는 막강 92학번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정민철, 박재홍, 차명주, 안희봉 등등) 대열에서 결코 선두라고는 할 수 없었던 박찬호의 성공을 필두로 김병현, 최희섭, 서재응, 봉중근을 비롯하여 모두 유망주들을 일찍 데려다가 키워내는 쪽이 나았습니다.

게다가 한국 야구 선수들, 고교 때부터 혹사당해서 선수생명이 짧습니다. (이건 일본도 만만치 않습니다. 마쯔자카는 200구를 우습게 던지더군요). 일전에 말했지만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는 선동렬보다 한 살 위입니다. 올해 MLB MVP를 3년 연속 수상한 배리 본즈는 장종훈보다 4살이 많습니다(약물 복용의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우리 프로리그에서 9년 뛰고 난 다음에 MLB를 가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 가지 말라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게다가 이승엽은 파워히터인데 마쯔이 히데끼의 전례(한 시즌 홈런 16개)로 보아 동양 선수의 파워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런 것은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 즉 일본 야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을 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도 야구에 관심 있는 분들은 대부분 아시는 것입니다만 말입니다.

한 때 온 나라를 농구의 열풍에 빠지게 만들었던 만화가 있습니다. 이노우에 다케히꼬의 <슬램덩크>입니다.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윤대협… 이젠 전설이 되어버린 이 만화의 주인공들입니다. 이 미워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들의 향연과 숨막히는 승부 이면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숨어있습니다.

<슬램덩크>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된 만화입니다. 중간에 쉰 기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려 6년 동안 연재된 이 만화의 내용상의 기간은 겨우 3개월 남짓입니다. 강백호의 고등학교 입학, 도내 예선, 도내 결선, 전국대회 출전 후 3차전 탈락!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채치수는 대학 간다고 농구를 그만둡니다.

다시 농구에서 야구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어렸을 적 독고탁이 나오는 이상무 화백의 만화에서 보았던 갑자원 대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발음으로 고시엔이라고 불리는 이 대회는 약 4,000개 이상의 팀으로부터 예선을 통해 32개 팀을 선발하여 벌이는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입니다. 흔히 꿈의 대회라고 불리는 이 대회에 한번이라도 참가하기 위해 4,000여개 팀의 선수들이 땀을 흘립니다(일본의 고교 야구대회는 봄여름의 두 대회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네들이 밥만 먹고 야구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전국의 거의 모든 학교에 다양한 종목의 운동부들이 있고, 누구나 하고 싶은 운동을 하고, 그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소위 그 종목의 명문고로 진학을 하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계속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다가 각자 적성과 형편에 맞게 사회에 나가는 방식입니다. 한 학년에 10명씩의 선수가 있다고만 해도 1년에 5만명 이상의 야구선수 출신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 중에서 대학이나 프로에 진학하는 것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그 나머지들이 계속 야구를 보고 즐기고 받쳐주는 버팀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국에서 열린 2002 한일월드컵기간에도 야구가 축구보다 더 인기 있는 나라, 일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일본 야구 인프라의 한 단면입니다.

인프라(하드웨어)가 있어야 시스템(소프트웨어)이 제대로 작동합니다. 인프라가 없이 시스템만을 가져오는 것은 마치 486컴에다가 윈도즈XP 프로페셔널을 돌리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날 뿐입니다. 여기저기서 이런 제도, 저런 제도, 좋다는 것은 무조건 수입해다가 시도해 보는데도 다 문제투성이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스템이 돌아가는 환경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강점은 시스템보다는 인프라에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일본의 시스템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랑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네들도 변화를 상당히 싫어합니다. 바로 이런,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하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지금 일본이 장기불황에 허덕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모습을 아주 잘 풍자한 영화가 <춤추는 대수사선2>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시스템을 잘 풍자했지만 일본의 한계를 또한 잘 보여줍니다.

1999년 일본의 경제평론가라는 오마에 겐이치가 IMF 탈출을 위해 진력을 다하는 우리 정부에 직격탄을 날립니다. 제목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다시 설 수 없는 이유>. 요지는 이런 겁니다. 한국은 일본의 하청업체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의 시스템과 유사하다(재벌체제 이런 것), 미국과 일본의 경제 시스템은 다르다, 한국은 일본에 붙어라, 미국에 붙으면 황새 흉내낸 뱁새 마냥 가랑이 찢어지는 수가 있다. 이 센세이셔널한 글 하나로 우리나라 조폭언론들과 한나라당에서 얼마나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이 오마에 겐이치라는 인간으로 말하자면 망언제조기 동경도지사 이시하로 신따로나 <전쟁론>의 고바야시 요시노리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입니다. 그가 쓴 글이 실린 잡지 <사피오>는 일본 (극)우파의 정론지, 말하자면 일종의 <월간조선>이죠. 아무튼 자기네 시스템을 따르라던 일본은 지금 10년이 넘는 장기 불황, 이 모양 이 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일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상대인데 그 이유는 과거 그네들의 금력으로 쌓아올린 인프라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차범근 감독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그가 독일에서 오자마자 한 일이 유소년 축구라는 것, 어린아이들이 축구 하는 구석에서 망치 들고 얼음을 깨고 있는 그 한 장의 사진을 보신 분이면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미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또는 진출한 많은 야구 선수와 코치들을 봐 왔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심각한 자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아니 자각은 하겠죠.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고치기 위해 나서지 않는 듯합니다. 드러나는 일도 아니고 돈도 안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고 외면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럽다고 욕하기는 쉬워도 그걸 청소해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청소하고 새로운 구조,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참여도 해야 합니다. 물론 비판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비판이 참여는 아닙니다. 참여해서 공고한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차떼기 하는 도둑놈들,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저 정치모리배들, 땅따먹기 정치하는 인간들이 발붙이지 못할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스타일 좀 구겨지더라도 말입니다.

[추신] 이승엽 선수가 일본으로 진로를 돌렸다니 (일시적일지 몰라도) 일본에 가서 꼭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열심히 운동을 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과 함께 좋은 안목도 길러오시기 바랍니다. 미래를 배워 오십시오. 그게 당신을 떠나보내는 국내 야구팬에 대한 당신의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2003년 10월 20일 월요일

보스톤 대 양키스 AL챔피언십 7차전을 보고

뉴욕. 명실공히 미국의 상징 도시입니다. 오죽하면 알카에다의 공격 목표이겠습니까. 경제와 금융의 도시이며 행정수도는 워싱턴 DC이지만 실질적인 미국의 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맨하탄, 브로드웨이… 뭐 더 이상 설명은 무의미 할 정도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보스톤. 메이플라워호와 함께 미국 역사가 시작한 뉴 잉글랜드(메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코네티컷주)의 대표적 도시입니다. 미국의 역사가 시작했다는 자부심이 무척 강하고 MIT, 하버드, 예일(예일은 코네티컷이지만) 등 소위 미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대학들이 모여있는 미국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뉴욕 양키스. 자타가 공인하는월드시리즈 우승 26회 경력의 미국 최고의 프로야구팀입니다. 어딜가나 팬이 많지만 안티 팬들도 많습니다. 일본의 요미우리처럼 돈으로 야구를 한다는 비난이 있지만 미국인을 양키라고 하듯이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팀입니다.

보스톤 레드삭스. 양키스와 같은 지구에 속에 언제나 2등의 수모를 당했던 비운의 팀입니다. 베이브 루스를 양키스에 팔아먹었다가 1918년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우승을 못한 ‘밤비노의 저주’가 유명합니다. 때문에 양키스에 대한 깊은 경쟁심을 갖고 있습니다.


로저 클레멘스. 1984년 보스톤 레드삭스에서 데뷔해서 보스톤에서 뛴 13년 동안 3회 사이영상을 수상한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습니다. 토론토를 거쳐 99년 보스톤의 숙적 양키스에 입단하였고 97, 98년 토론토에서 두 번, 2001년에 양키스에서 다시 사이영상을 수상, 생애 6번 사이영상의 영예를 안은 일명 로켓맨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를 때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오르겠다고 보스톤의 염장을 지른 당대 최고 투수입니다. 참고로 1962년 생으로 선동렬보다 1살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17승이나 올렸습니다(선동렬 선수의 실제나이는 호적과 다르다는 설이 있지만 어쨋든 부럽습니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로켓맨의 뒤를 이어 보스톤의 최고 에이스로 떠오른 일명 외계인입니다. 박찬호보다 2년 먼저 LA 다저스에서 데뷔했고 몬트리올을 거쳐 보스톤 레드삭스에 입성했습니다. 1999년, 2000년 연속 2회 사이영상 수상자이고 보스톤 마운드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이상하게 올해는 페드로만 나오면 방망이가 침묵해서 14승 밖에 못했지만 방어율 1위로 자기 할 몫은 하고도 남았습니다. 일부 팬 및 언론과 사이가 엄청 나쁘고 인터뷰도 안하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올 시즌을 끝으로 보스톤을 떠난다고 합니다.


자, 이정도 설명을 드렸으면 어제 MLB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쉽 7차전이 얼마나 야구팬들에게 흥미를 끌었던 경기인지 좀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거 그다지 흔히 찾아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우리야 김병현이 나오느니 안나오느니 이런게 관심이지만 얘네들 사실 그런 거 신경도 안쓰는 분위깁니다. 물론 좀 지나면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결국 어제 경기를 진 것도 일정부분 보스톤 불펜의 탓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랜 야구팬으로서 저는 어제 경기에서 너무나 인상 깊었던 것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제가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의 김재박이 7관왕 하던 시절부터 한국, 일본, 미국 야구를 모두 골고루 꽤 많이 본 사람이지만 어제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첫번째는 로저 클레멘스가 4회 아웃카운트도 하나 못잡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순간이었습니다. 4회초에 4대 0이면, 그것도 상대투수는 당대 최고라는 페드로, 누구라도 이 순간에는 ‘졌다!’는 느낌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뉴욕의 팬들 전원이 기립해서 4점이나 주고 노아웃에 1, 3루에 주자를 둔 채 마운드를 내려가는 마흔 한 살의 노장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아, 그 광경을 제 글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표현을 그 때 쓰는 것이던가요.

김병현이 가운데 손가락 쳐들었던 상황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물론 야유를 하건 응원을 하건 그건 모두 팬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전 관중이 하나되어, 객관적으로는 승리가 가물가물하던 그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않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쓸쓸한 노장 선수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그 양키스 팬들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싶습니다. 비록 제가 양키스를 좋아하지도 응원하지도 않았지만 말입니다.

아무래도 보스톤의 팬들하고 비교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일부이지만 극성스런 팬들, 걸핏하면 죽인다 살린다 하고, 언론은 그걸 확대 재생산하고 불을 지피는 환경 속에서 누가 신나서 플레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꼭 우리나라 정치상황하고 비슷하지요. 어제 끝내기 홈런으로 양키스의 승리가 결정되고 온 선수들과 관중이 환호하는 장면을, 동료 선수들이 다 떠난 덕아웃에 혼자 앉아 뚫어지게 쳐다보는 페드로의 얼굴에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이 겹쳐 보였던 이유가 그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나라 찌라시들 보스톤 언론을 맨날 깝니다. 널뛰기하는 보스톤 언론, 김병현 죽이기, 어쩌고 하지만 사실 그게 자기 동료기자들 모습인지는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인상 깊었던 얘기는 바로 그 언론이야기입니다. 어제 피말리는 연장 11회말, 대주자로 나왔다가 타석에 들어선 애론 분이 끝내기 홈런을 칩니다. 기뻐하는 선수들, 환호하는 관중, 마운드에 철퍼덕 쓰러져 우는 마리아노 리베라… 저는 그 장면을 너무 생생하게 듣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았냐구요? 올해 포스트시즌을 단독 중계하는 폭스 TV의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무려 5분 정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화면만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방송에서 3초 이상 말이 안나가면 방송사고라지요? 그런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려 5분 가까이 그들은 아무말도 않고 화면과 현장의 소리만 내보내더군요.

왜 그들이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너무나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관중들과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환호성과 울음소리는 그 어떤 멘트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현장의 목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록 제가 응원하던 팀이 너무 안타깝게 지고 말았지만 그 속에서도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 컴퓨터에는 2002년 월드컵 8강, 4강 결정 당시의 장면을 담은 동영상 화일이 있는데, 방송 3사 모두 아나운서, 해설자가 서로 한마디라도 더하려고 자기들끼리 떠들던 모습과 사못 대조적입니다. 아, 그 송재익, 신문선 콤비의 시끄러움! 뭔가 비장한 문구를 잔뜩 써와서 읽어 내려가며 차범근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던 임주환 캐스터의 모습이라니!

언론이란 뭘까요. 미디어라는 것이 매개체 아닌가요? 그런데 우린 언론은 자꾸 자기 목소리를 여론에 실어 보내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민들은 오히려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데 말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중립은 없고 언론이 자기 목소리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언론을 언론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점검이 있고 자기 혁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언론이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방식은 우리처럼 정치판의 주인공으로 뛰어드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언제쯤 우리가 그런 언론 환경 속에 살 날이 올까요.

보스톤이 리드하고 있어도 제가 불안했던 이유는 밤비노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경기 내내 화면에 비춰주는,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팬, 모자를 눌러쓰고 차마 경기장을 응시하지 못하는 팬, 간절함이 얼굴에 가득한 그러면서도 야구를 즐기는 팬들의 모습을 보고서 입니다. 그들의 염원이 하늘을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승리는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승리의 기쁨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감히 여기에 노무현을 사랑하는, 또는 지지하는 사람들(노사모이건 아니건)의 모습을 비춰봅니다. 우리도 저런 환경, 저런 여건 속에서 싸운다면 넉넉히 이기고도 남을 텐데, 그러면 좀 더 나은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편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만 해준다면, 솔직하게 현장의 소리만 들려준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경기가 접전일 수록 승리의 기쁨도 큰 법! 그럴 수록 다시 힘내서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으로 졸필의 끝을 맺겠습니다.

평안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