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20일 월요일

보스톤 대 양키스 AL챔피언십 7차전을 보고

뉴욕. 명실공히 미국의 상징 도시입니다. 오죽하면 알카에다의 공격 목표이겠습니까. 경제와 금융의 도시이며 행정수도는 워싱턴 DC이지만 실질적인 미국의 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맨하탄, 브로드웨이… 뭐 더 이상 설명은 무의미 할 정도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보스톤. 메이플라워호와 함께 미국 역사가 시작한 뉴 잉글랜드(메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코네티컷주)의 대표적 도시입니다. 미국의 역사가 시작했다는 자부심이 무척 강하고 MIT, 하버드, 예일(예일은 코네티컷이지만) 등 소위 미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대학들이 모여있는 미국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뉴욕 양키스. 자타가 공인하는월드시리즈 우승 26회 경력의 미국 최고의 프로야구팀입니다. 어딜가나 팬이 많지만 안티 팬들도 많습니다. 일본의 요미우리처럼 돈으로 야구를 한다는 비난이 있지만 미국인을 양키라고 하듯이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팀입니다.

보스톤 레드삭스. 양키스와 같은 지구에 속에 언제나 2등의 수모를 당했던 비운의 팀입니다. 베이브 루스를 양키스에 팔아먹었다가 1918년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우승을 못한 ‘밤비노의 저주’가 유명합니다. 때문에 양키스에 대한 깊은 경쟁심을 갖고 있습니다.


로저 클레멘스. 1984년 보스톤 레드삭스에서 데뷔해서 보스톤에서 뛴 13년 동안 3회 사이영상을 수상한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습니다. 토론토를 거쳐 99년 보스톤의 숙적 양키스에 입단하였고 97, 98년 토론토에서 두 번, 2001년에 양키스에서 다시 사이영상을 수상, 생애 6번 사이영상의 영예를 안은 일명 로켓맨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를 때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오르겠다고 보스톤의 염장을 지른 당대 최고 투수입니다. 참고로 1962년 생으로 선동렬보다 1살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17승이나 올렸습니다(선동렬 선수의 실제나이는 호적과 다르다는 설이 있지만 어쨋든 부럽습니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로켓맨의 뒤를 이어 보스톤의 최고 에이스로 떠오른 일명 외계인입니다. 박찬호보다 2년 먼저 LA 다저스에서 데뷔했고 몬트리올을 거쳐 보스톤 레드삭스에 입성했습니다. 1999년, 2000년 연속 2회 사이영상 수상자이고 보스톤 마운드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이상하게 올해는 페드로만 나오면 방망이가 침묵해서 14승 밖에 못했지만 방어율 1위로 자기 할 몫은 하고도 남았습니다. 일부 팬 및 언론과 사이가 엄청 나쁘고 인터뷰도 안하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올 시즌을 끝으로 보스톤을 떠난다고 합니다.


자, 이정도 설명을 드렸으면 어제 MLB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쉽 7차전이 얼마나 야구팬들에게 흥미를 끌었던 경기인지 좀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거 그다지 흔히 찾아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우리야 김병현이 나오느니 안나오느니 이런게 관심이지만 얘네들 사실 그런 거 신경도 안쓰는 분위깁니다. 물론 좀 지나면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결국 어제 경기를 진 것도 일정부분 보스톤 불펜의 탓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랜 야구팬으로서 저는 어제 경기에서 너무나 인상 깊었던 것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제가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의 김재박이 7관왕 하던 시절부터 한국, 일본, 미국 야구를 모두 골고루 꽤 많이 본 사람이지만 어제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첫번째는 로저 클레멘스가 4회 아웃카운트도 하나 못잡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순간이었습니다. 4회초에 4대 0이면, 그것도 상대투수는 당대 최고라는 페드로, 누구라도 이 순간에는 ‘졌다!’는 느낌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뉴욕의 팬들 전원이 기립해서 4점이나 주고 노아웃에 1, 3루에 주자를 둔 채 마운드를 내려가는 마흔 한 살의 노장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아, 그 광경을 제 글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표현을 그 때 쓰는 것이던가요.

김병현이 가운데 손가락 쳐들었던 상황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물론 야유를 하건 응원을 하건 그건 모두 팬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전 관중이 하나되어, 객관적으로는 승리가 가물가물하던 그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않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쓸쓸한 노장 선수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그 양키스 팬들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싶습니다. 비록 제가 양키스를 좋아하지도 응원하지도 않았지만 말입니다.

아무래도 보스톤의 팬들하고 비교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일부이지만 극성스런 팬들, 걸핏하면 죽인다 살린다 하고, 언론은 그걸 확대 재생산하고 불을 지피는 환경 속에서 누가 신나서 플레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꼭 우리나라 정치상황하고 비슷하지요. 어제 끝내기 홈런으로 양키스의 승리가 결정되고 온 선수들과 관중이 환호하는 장면을, 동료 선수들이 다 떠난 덕아웃에 혼자 앉아 뚫어지게 쳐다보는 페드로의 얼굴에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이 겹쳐 보였던 이유가 그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나라 찌라시들 보스톤 언론을 맨날 깝니다. 널뛰기하는 보스톤 언론, 김병현 죽이기, 어쩌고 하지만 사실 그게 자기 동료기자들 모습인지는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인상 깊었던 얘기는 바로 그 언론이야기입니다. 어제 피말리는 연장 11회말, 대주자로 나왔다가 타석에 들어선 애론 분이 끝내기 홈런을 칩니다. 기뻐하는 선수들, 환호하는 관중, 마운드에 철퍼덕 쓰러져 우는 마리아노 리베라… 저는 그 장면을 너무 생생하게 듣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았냐구요? 올해 포스트시즌을 단독 중계하는 폭스 TV의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무려 5분 정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화면만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방송에서 3초 이상 말이 안나가면 방송사고라지요? 그런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려 5분 가까이 그들은 아무말도 않고 화면과 현장의 소리만 내보내더군요.

왜 그들이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너무나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관중들과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환호성과 울음소리는 그 어떤 멘트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현장의 목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록 제가 응원하던 팀이 너무 안타깝게 지고 말았지만 그 속에서도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 컴퓨터에는 2002년 월드컵 8강, 4강 결정 당시의 장면을 담은 동영상 화일이 있는데, 방송 3사 모두 아나운서, 해설자가 서로 한마디라도 더하려고 자기들끼리 떠들던 모습과 사못 대조적입니다. 아, 그 송재익, 신문선 콤비의 시끄러움! 뭔가 비장한 문구를 잔뜩 써와서 읽어 내려가며 차범근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던 임주환 캐스터의 모습이라니!

언론이란 뭘까요. 미디어라는 것이 매개체 아닌가요? 그런데 우린 언론은 자꾸 자기 목소리를 여론에 실어 보내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민들은 오히려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데 말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중립은 없고 언론이 자기 목소리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언론을 언론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점검이 있고 자기 혁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언론이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방식은 우리처럼 정치판의 주인공으로 뛰어드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언제쯤 우리가 그런 언론 환경 속에 살 날이 올까요.

보스톤이 리드하고 있어도 제가 불안했던 이유는 밤비노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경기 내내 화면에 비춰주는,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팬, 모자를 눌러쓰고 차마 경기장을 응시하지 못하는 팬, 간절함이 얼굴에 가득한 그러면서도 야구를 즐기는 팬들의 모습을 보고서 입니다. 그들의 염원이 하늘을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승리는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승리의 기쁨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감히 여기에 노무현을 사랑하는, 또는 지지하는 사람들(노사모이건 아니건)의 모습을 비춰봅니다. 우리도 저런 환경, 저런 여건 속에서 싸운다면 넉넉히 이기고도 남을 텐데, 그러면 좀 더 나은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편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만 해준다면, 솔직하게 현장의 소리만 들려준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경기가 접전일 수록 승리의 기쁨도 큰 법! 그럴 수록 다시 힘내서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으로 졸필의 끝을 맺겠습니다.

평안을 기원하며

2003년 6월 28일 토요일

오아시스, 우린 다 병신이다!

간밤에 끄적였던 글을 다 지웠다. 그리고 다시 쓴다. 제목을 바꿀 생각이다. "우린 다 병신이다~". 그래 이게 좋겠다.

'병신'이라는 말 쓰면 안되는 말이다. 일본에서 놀랐던 것이 있다. 주변에 일본어 잘 하는 사람에게 물어 보라. 장님이 일본말로 뭐냐고. 아마 잘 모를 것이다. 그럼 앉은뱅이는? 이런 말을 차별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런 차별어를 사회적으로 안쓰기로 했고 점점 없어져 간다고 한다(뭐 찾아보면 없지는 않겠지만). 전 세계에서 욕이 가장 발달했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떤가? 그건 애들만 보면 안다. 애들이 다른 친구들을 놀리는 말. 이거 거의 전부 차별어다. 하다못해 '숏다리'까지 나왔다. 작년에 한겨레에 어느 목사니이 차별어 쓰지 말자는 운동을 하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아무튼 '병신'도 차별어가 된 말이다. 원 뜻이야 '병든 몸'이라는 뜻일지 몰라도. 따라서 이런 말도 안 써야 된다. 하지만 이 말 말고 다르게 표현할 방도를 못찾겠다. 그러니 한 번만 양해를 구한다. <오아시스>는 말한다. 우린 모두 병신이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고 봤다. 이 영화가 스펙터클 영화라서가 아니다. 문소리가 연기하는 한공주를 들여다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게 쥐어짜며 이야기하는 그 내용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하니 나도 한공주처럼 발이 꼬이고 팔에 힘이 들어간다. 이게 신체적인 불편함이라면 내용도 불편하다. 사회부적응자와 지체장애인의 사랑.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있을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더 불편하다. 그래, 사실 우린 우리와 다르면 불편하다. 간밤에 썼던 내 글을 다 지운 이유가 바로 이 문장 때문이었다. "우린 나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감독의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나온 '범주' 또는 '경계'의 담론이 주는 유익을 이 영화에서 발견한다. 대체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정상인이란 말인가. 사실 모두 장애인이고 모두 정상인이다. 그래 맞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사실 생각이 조금만 있다면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영화에서는 누구도 악인이 아니다. 마치 몇몇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동생을 이용해 아파트를 얻은 오빠는 나쁜놈일까? 아니다. 그래도 생일이라고 찾아오고 2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그의 이름은 한상식이다. 그게 우리의 상식이라는 말이다.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동생을 대신 깜빵에 보낸 형은 나쁜 놈일까? 아니다. 그래도 그 형은 끝까지 동생을 사람 만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형수가 삼촌 설경구의 무릎에 옥도정기를 발라주며 하는 대사는 이 영화의 압권이다. '난 삼촌이 정말 싫어요. 삼촌이 제발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형수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반인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거면 아예 집으로 들이지도 않는다. 카센터에서 자는 것도 불안해서 그냥 두지 않았을 거다. 그건 정말 사회부적응자를 둔 가족의 모습이다. 악한도 그렇다고 선인도 아닌 딱 그만큼의 우리 사람들 모습이다.

선인도 악인도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우리 사회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소외당하고 우린 살아간다. 그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성찰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여백을 이 영화는 관객에게 선사한다. 이 영화가 무슨 계목영화가 아니다. 그건 그냥 여백일 뿐이다.

문소리가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건 말건, 이 영화의 장르가 멜로건 판타지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건 말건 아무튼 오아시스는 봐야 되는 영화다. 영화가 재미있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오해서도 아니다. 영화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문학가 출신의 감독이 우리 사회에 보내는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권하는 바이다.    

[덧붙여]
솔직히 내 취향엔 <박하사탕>의 울림이 더 크다. 그건 아직도 나의 사고의 기준이 과거에 많이 붙잡혀 있다는 것일 게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박하사탕>과 비슷한 다른 영화다. 삶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하고 이야기에서 다르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가장 많은 의문을 가졌던 내용이 바로 자신을 범하려던 홍종두에게 전화하는 한공주의 설정일 것이다. 그냥 내가 이해하기로는 자신의 집을 무단침입해 자신을 거의 무시하고(마치 애완동물을 보듯이) 사랑을 나누는(?) 옆집 부부와 자신을 이용해 아파트를 당첨받고도 자신을 데리고 가서 이용해 먹은 오빠에 대한 실망과 외로움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2002년 8월 18일 일요일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김영사, 제임스 콜린스, 제리 포라스 지음)을 읽다.

내가 본 책 중에서 최악의 번역은 갈브레이스가 지은 범우사판 <불확실성의 시대>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 책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은 아마 내가 본 책 중에 최악의 역제(譯題)를 가진 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잠깐, 잠깐, 여기서 이 책에 대한 평가가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으로 재미를 톡톡히 본 김영사가 그 연장선상에서 이 책을 끼워 팔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는 것은 둘째치고 이 책의 장점마저 너무 죽여버리는 결과가 되었다고 본다. 신문 편집을 '제목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그 때문에 일어나는 불필요한 오해들에 대해 출판계도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Built to Last]이고 부제는 [Successful habits of Visionary Companies]이다. 책의 어디를 봐도 '8'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성공하는 기업'?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저자들은 성공하는 기업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비전기업이다. 그러니 굳이 좀 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제목을 붙이려면 그냥 <비전 기업>정도로 했으면 좋았을 텐데...(여기서 잠깐. 사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도 원뜻은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highly effective people)'의 7가지 습관>이다.) 자, 재미없는 제목이야기는 여기까지!

최근에 개인적으로 '경영'이라는 것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현실적이고도 지적인 호기심 때문에 요즘 다시 책을 들었다. 과거에 주말 서점 트립(이건 순전히 내가 지어낸 용어다.)을 하면 이런 '처세'류로 분류되는 책들을 비웃던 내 천박한 우등의식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솔직히 그런 책을 읽고 만족했던 기억도 별로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오히려 현실적인 필요를 절감하던 때인지라 동 분야 최고의 책(정말?)이라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었을 때보다 더 울림이 크다.  

저자들은 6년에 걸친 치밀한 조사를 통해 비전기업(visionary company)에 대해 분석했다.  하지만 단순하게 각 부문에서 선정된 기업들의 공통점을 나열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개별기업들의 역사와 성장을 동시대의 비교 기업들과 비교하여 무엇이 금메달과 은메달을 결정짓는지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분석은 많은 통찰을 준다.

먼저 책장을 넘기자마자 뒤통수를 한 대 딱 치며 정신을 확 깨게 만드는 것이 12개의 신화를 부수는 것이다. 그 12개의 신화는 다음과 같다.

1. 일류 기업을 시작하려면 일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2. 비전 기업에는 위대하고 카리스마적인 비전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3. 성공적인 회사들은 우선적으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4. 비전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올바른' 핵심 가치 중에는 공통 부분이 있다.
5.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6. 우량 기업들은 안전 위주로 일을 한다.
7. 비전 기업들은 누구에게나 일하기 좋은 직장이다.
8. 크게 성공한 회사들은 보기 좋고 복잡한 전략적 기획에 의해 그들의 움직임을 결정한다.
9. 근본적인 변화를 자극하기 위해 외부에서 CEO를 고용해야 한다.
10. 성공한 기업은 주로 경쟁기업을 물리치는 데 관심을 둔다.
11. 두 마리 토끼를 좇을 수는 없다.
12. 기업들은 기본적으로 '비전 선언문'을 통해 비전을 갖는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이러한 관념들이 어떻게 깨어지는지는 이 책을 직접 읽으면서 느껴보시기를 바란다. 다만 이 모든 신화가 '틀렸다'라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것은 틀렸고 어느 것은 상관없다는 거다.

아마 이 책 제목에서 8가지 습관이라고 한 것은 이 책이 총 10장으로 되어 있고 그 첫째와 마지막을 생략한 나머지 8장의 제목을 가지고 붙인 듯하다. 그 제목들을 한 번 나열해 보면

1. 시간을 알려주지 말고 시계를 만들어 주라.
2. 이윤추구를 넘어서
3. 핵심을 보전하고 발전을 자극하라.
4. 크고 위험하고 대담한 목표
5. 사교(私敎)같은 기업 문화 (私敎라는 단어도 있나???)
6. 많은 것을 시도해서 잘되는 것에 집중하라
7. 내부에서 성장한 경영진
8. 끊임없는 개선 추구

이다. 저자들은 나중에 이것을 4가지 정도로 요약하는데 시계 만들기(회사 그 자체, 조직 그 자체의 중요성), '그리고'의 영신(상반된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 핵심의 보존과 발전의 자극, 그리고 얼라인먼트(끊임없는 개선)이다.

대부분의 책, 또는 설교의 맹점은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친절하게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드는 갖가지 의문들을 따로 정리하여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저자들의 사려 깊은, 또는 진지한 성찰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런 잡글을 쓰면서 맨 뒤에다가 조금이나마 덧붙이지 않으면 안되는 비판의 글을 쓰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수고를 덜게 해 주었다는 점에 있어서도 저자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이래서 좋은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


[덧글]
1. 그렇다면 한국에서 비전기업을 꼽으라면 어디를 들 수 있을까. 내내 생각났던 기업은 이랜드였다. 요즘엔 도대체 회사가 아직도 있는지 조차 모르겠지만 그래도 뚜렷한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운영했던 기업이 아닌가 한다. 저자들이 비전기업이라고 꼽은 IBM이 현재 고전을 면치 못하듯이 이랜드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리고는 풀무원, 유한양행, 뭐 이런 정도가 아닐까? 물론 실제적인 경영지수 같은 것은 잘 모르겠지만...

2. 저자들이 말한 대로 이것은 기업뿐만이 아니라 NGO등에도 해당되는 점들이 있다.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읽어도 무리는 없다고 본다. 죠이 설문을 보면서 더욱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2002년 3월 8일 금요일

<와이키키 브라더스> 행복에 대해 질문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다.

까를로스 산타나의 <유로파>의 연주로 시작해서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로 끝나는 이 영화는, 주인공의 삶 역시 <유로파>에서 <사랑밖에 난 몰라>만큼으로 추락하는, 또는 변해가는 내용을 닮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절망은 아니다. 분명히 평범한 우리네 인간 군상들이 보기에는 일종의 추락이고 절망인데, 감독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묻는다. "너 행복하니?"

그렇다. 누가 영화 광고 카피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질문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당신은 행복한가. 왜 행복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아니면 돈이 많아서? 그 정답은 무엇일까...

최근 내 개인적인 고민거리이자 관심거리는, 연극이나 드라마 제목으로 유명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최근 회사 생활을 하면서, 또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이 사람들은 무엇을 기쁨으로 사는지 궁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관심거리도 다양하고 각자의 삶이 천차만별이지만 그걸 통일해서 묶을 무엇이 과연 있을까? 솔직히 드는 첫 번째의 생각은 '돈'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다. 사회의 물신화니 자본주의의 노예니 뭐니 많은 사회과학적인 분석도 대부분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만악의 근본이고 우상이라고 배우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돈은 '좋은 수단'이라는 이유로 주객전도의 원인제공을 한다.

물론 돈이 최고는 아니다. 하지만 무얼 하든지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 즉 행복이라는 층위의 최고가 아니고 근본이다. 그렇기에 돈은 더 우리를 얽맨다. 최고가 아니고 근본이기에 우리의 선택이나 생활 습관에 있어서 돈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거부할 것으로 예상되듯이, 행복과 돈은 같지 않다. 행복의 층위의 기초에 돈이 있더라도 말이다.

바로 그 때, 임순례 감독은 보여준다. 이런 삶은 어때?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어느 무명밴드 기타리스트의 모습은 초라하고 또 초라하다. 헐리욷 영화라면 돈을 많이 벌거나(소위 성공하거나), 돈을 초월한 인간승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감동을 선사하겠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예술영화라고 한다면 돈에 의해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사람의 폐부를 긁어놓겠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도 않다.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다. 계속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고 들어오면서 말이다.

음악의 꿈을 못 버려 가라오케에서 기타 하나로 자신의 음부를 가리고 연주를 하는 주인공은 과연 행복할까? 그렇다고 학창시절 밴드의 꿈을 키워오다가 그 꿈을 버리고 약사로, 공무원으로,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는 원조 와이키키 부라더스 멤버들은 행복할까? 아니면 그들은 정말 불행할까?

그 해답을 찾는다면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가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덧붙여] 중학교 시절, 친구 다섯명이 그룹사운드 하나 만들어서 멋들어지게 남들 앞에서 폼잡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다섯명 중에 인문계 주간 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은 단 두 명. 그걸로 우리들은 흩어졌고, 나는 공부에 귀의했다(정말?).

고등학교 1학년 겨울에 수학여행을 갔는데 텅빈 경주시내 어느 호텔인지 여관에서 있었던 장기자랑에서 나는 우리반 대표로 등떼밀려 노래를 불렀고(꿈의 대화), 내 중학교 친구중 하나는 정말 그룹사운드를 만들어서 노래를 부르더군... 음... 이 영화를 보면서 왜 그때 생각이 자꾸 나는지... 왜 좀 서글픈지...

2002년 1월 8일 화요일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를 읽다.

대게 그러하듯 경영인이나 정치인의 책은 허무하다. 그런 책은 어느 정도 본말전도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 바쁜 사람들이 책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쓰는 책은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정치인의 책은 후원회나 선거를 의식한 일종의 광고이며 경영인들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다. 게다가 직접 쓰지 않고 대부분 대필(거의 창작 수준의 경우도 있지만)이다. 조성기의 소설에서였던가 어디선가 대필작가의 애환을 다룬 소설도 있었다. 물론 왕회장 같이 대단하신 분들은 TV 작가 김수현같은 거장(?)에게 대필을 부탁하기도 한다지만...

아무튼 안철수연구소의 코스닥 상장과 비슷한 시점에 나온 이 책에 대해 호감을 가질 생각이 나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책제목이 맘에 걸렸다. 영혼이 있는 승부? 이건 경영인들의 책제목이 아니다. 로버트 슐러의 <불가능은 없다> 돌아가신 왕회장의 <실패는 있어도 시련은 없다>, 희대의 사기꾼이 된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뭐 이렇게 제목만 봐도 뭔가 '필'이 팍 오는(사지 말아야겠다는^^) 제목이 아니고 영혼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제목이 조금은 생소했고, 안철수 연구소의 주가 폭등에도 "우리는 절대 주가를 관리하지 않겠다"(정말?)라는 그의 신문기사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안철수. 그는 조금 이상한 이력의 사람이다. 사람의 이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느 면에서 천박하고 어느 면에서는 당연하다. 전자는 그 사람의 출신 지역이나 학교 등을 따지는 것이고, 후자는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을 보는 것이다. 하여튼 그는 의사이고 의대교수였고(나는 의례 의사들이 그러하듯이 무슨 외래교수정도인줄 알았는데 정식으로 대학의 의예과 학과장까지 했다) 벤처기업 사장이다. 이 두가지 이력의 딱 하나 연관성은 '바이러스'라는 것인데, 아직도 컴퓨터 바이러스가 컴퓨터를 오래하는 사람에게 걸리는 질병으로 아는 어른(우리 아버지)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사실 내가 쓰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병원성 바이러스와 컴퓨터 바이러스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것인 것을 알 것이다. 그렇다. 이 둘은 분명 다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전혀 다른 두가지의 이력을 갖고 있는 독특한 사람이다.

결국은 그가 의사를 포기하고 벤처기업 사장이 되었다. 1,000만달러 인수제의(과연 나라면? 판다. 당신이라면?)를 거부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그런게 아니다. 가끔 보면 분명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나누는 사람들, 왼손이 모르게 좋은일 하는 사람들이 드물지만 찾아보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사장이 되지 못한다. 사장이란 이익을 극대화하고, 회사를 키우고, 대박을 터뜨리고, 이름을 날리고, 수단과 방법보다는 결과가 말하고, 뭐 이래야 하는 것이다. 정직하게 사업한다? 웃기는 소리다. 적어도 내가 보고 들은 바는 그렇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조금 다르다. 그는 자화자찬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을 다룰 줄 안다. 그는 자신의 꿈을 더 거대하고 예쁘게 포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비전에 따라오지 못하는 사원들에 대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설프지 않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드물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주목하게 되었고, 언제나 그냥 넘기던 신문의 주식시세표에서 그의 회사 주가에 주목한다.  

영혼이 있는 승부. 그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영혼을 말한다. 정직과 성실로 승부한단다. 그래 그런 것이 가능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안철수 파이팅이다!!

2001년 11월 16일 금요일

나의 어머니 이야기

우리 가족이 그래도 이만큼 살아온 것은 순전히 어머니 덕이다. 맘 좋은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 시절 당신 동생에게 전재산(장난 아니게 큰 돈이었다)을 날리셨다. 그리고 또 나중에 형님에게도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빌려드렸는데 큰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것도 없는 돈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날린 돈만 갖고 있었다면 좀 더 넉넉히 사실 수 있을 텐데...

그 와중에 우리 어머니는 악착같이 사는 길이 정말로 사는(생존하는)길이라는 것을 배우시고 이런 저런 일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형제들은 의사에다 교수에다 다 잘나가는데 혼자만 약대에 진학했다가 등록도 포기하고, 6.25때 혼자되신 외할머니를 도와, 위로 형제 둘을 의대 공부시키고, 아래로 동생 둘을 대학 공부시킨 우리 어머니의 그 착한 맘씨 덕분에, 우리 아버지가 그 돈을 다 날리고 길바닥에 나앉게 될 무렵, 우리 가족은 이모, 외삼촌 덕분에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다. 아파트 청소부터 참기름 배달, 카세트 테입 외판원, 출판사 외판원 등등, 결국엔 그런 노력으로 날렸던 집까지 찾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우리 어머니 집안 청소를 해 본 역사가 없는 분이다(누가 오기 전에는). 집안일은 아버지가 대부분 하시는 거고, 어머니는 그저 손가락과 세치 혀로 조종을 하신다. 물론 밖에 나가서는 안 그러신다. 남의 집 김장김치는 다 해주고, 교회에서 일 있으면 죽어라 일하시고는 집에 들어와서는 여왕으로 군림하신다. 물론 절대 자식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 형제가 좀 깨끗한 집에서 살아보자고 온갖 투쟁을 다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니가 해!" 물론 우리도 안했고 이제는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아직도 우리 부부는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 "청소 해 놨어요?"라고 질문하고 어머니는 "우리가 아무 문제없이 사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반문하신다.

이렇듯 집안일에는 별로 신경쓰시지 않는 어머니를 할머니께선 언제나 못마땅해 하셨지만 그래도 하시는 말씀은 "그래도 네 엄마는 재주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건 자식들 3형제가 모두 물고 물리며 돈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신 할머니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꽤 짠돌이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어머니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견물생심이므로 보지 않는 것이 최고다. 또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은 남과 비교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요즘엔 경제 사정이 좀 나아져 달라졌지만 나는 아직도 꼬박꼬박 가계부를 적고 있다(놀랍지?). 다행인 것은 이런 면에서 우리 집사람과 죽이 잘 맞는다는 것이다. 우리 집사람이 만일 이런 면에서 나와 맞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벌써부터 쉬고 계신 아버지 때문에 부모님의 수입은 제로다. 유일한 수입원이 월세 받는 것인데 그게 얼마냐, 월 20만원이다. 아무리 우리 동네가 서울의 유명한 달동네라도 27평짜리 가정주택 2층이 그 정도일 수는 없다. 우리 전에 살던 사람이 전세 5000만원에 살았던 집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은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하은이가 태어나고 우리가 대전으로 이사를 결심할 무렵, 집을 내어 놓는다고 호산나넷에다가 글을 올렸더니 이집트 선교사를 하다가 잠시 귀국한 분한테 연락이 왔다. 1년 동안 살집을 구하는데 가진 돈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한달에 70만원 후원을 받는데 월 20만원 정도면 집세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나머지 가진 돈은 여기 저기서 꿔 가지고 보증금조로 200만원인가 그랬다. 물론 우리 어머니는 보증금 1000만원에 월 30정도를 생각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 분한테 연락이 온 시점이 바로 우리 하은이가 태어난 직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그 분들(사실은 나보다 어리다) 역시 하은이가 태어난 나흘 뒤에 첫 딸을 낳은 상태였는데 그 때까지도 집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산후조리할 곳도 없는 사정이 너무 딱해서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OK 사인이 낳다(아버지가 옆에서 부추긴 것은 당연한 것이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하은이가 건강하게 태어난 것에 너무나 감사한 어머니가 덜컥 '그냥 와서 사시라고 해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분명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1년이 되어가고 그 때의 감동이 식은 며칠 전 어느날. 국내 체류기간이 더 늘어나서 1년 더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두 가지 안을 가지고 2층에 올라 가셨다. 고민을 하신 이유를 말하자면 이렇다.

얼마전 어머니께서 대전에 혼자 내려오셨다. 그냥 하루 자고 가려고 오셨다고 하시더니, 가시는 날 아침 집사람한테는 이야기하지 말라며 나만 조용히 보자고 하셨다. 그러시더니 지금 형편이 어려우니 집에 돈 좀 더 붙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이고... 돈 많이(순전히 내 기준에) 번다는 아들넘이 부모님이 어찌 사시는 지 알지도 못하는 꼴이라니... 그러니 고민을 안하게 생기셨겠는가.

아무튼 2가지 안을 가지고 올라가셨는데 그 하나는 보증금을 조금 더 내는 것이오, 아니면 월세를 5만원만이라도 올려달라는 것이었단다. 그런데 아침 11시쯤 2층에 올라가보니... 그 부부가 커다란 상에 커다란 냄비를 하나 놓고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먹고 있더라나? 어머니는 아무말 않고 "1년 더 사세요"라고 말하고 내려오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얼마전 교회 행사 때문에 산 여러 가지 반찬이며 김치며 여러 먹을 것을 다시 다 싸들고 가서 주고 내려오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내 대답. "그 사람들, 라면이 좋아서 먹고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라고 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만 웃은게 아니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함께 신나게 웃었다. 이래서 때로는 인생이 유쾌하다!

2001년 10월 8일 월요일

봄날은 간다

<잊혀지는 것> by 동물원

사랑이라 말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
뜻 모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속삭이던 우리
황금빛 물결 속에 부드러운 미풍을 타고서
손에 잡힐 것만 같던 내일을 향해 항해했었지
눈부신 햇살 아래 이름 모를 풀잎들처럼
서로의 투명하던 눈길 속에 만족하던 우리
시간은 흘러가고 꿈은 소리 없이 깨어져
서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멀어져 갔지
우 그리움으로 잊혀 지지 않던 모습
우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져 가고
사랑의 아픔도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 가지

사랑이라 말하며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고
길 잃은 아이처럼 울먹이며 돌아서던 우리
차가운 눈길 속에 홀로서는 것을 배우며
마지막 안녕 이란 말도 없이 떠나갔었지
숨가쁜 생활 속에 태엽이 감긴 장난감처럼
무감한 발걸음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우리
시간은 흘러가고 빛바랜 사진만 남아
이제는 소식마저 알 수 없는 타인이 됐지
우 그리움으로 잊혀 지지 않던 모습
우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져가고
사랑의 아픔도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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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이 많은 영화의 장점은 뭘까. 영화를 보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8월의 크리스마스>가 그랬듯이 <봄날은 간다>도 여백이 많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동물원의 <잊혀지는 것> 생각이 났다. 내 대학교 1학년 시절. 드럼의 한박자 인트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 영화와 많이 닮았다. 감독이 변해가는 것을 담고 싶었다고 했던가? 아마 그건 잊혀지는 것과 동의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성공한 셈이다.

여백이 많은 영화의 단점은 뭘까. 아마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아니면 제 관중을 만나지 못하면, 재미가 없다느니,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한다느니 하는 불평이 터져나오고 만다는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어떤이는 재미없다고 '절대' 보지 말라고 했다하고, 어떤이는 '다시는 한국영화 안본다'고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품평만 믿고 영화를 놓친다면 당신은 보기 드문 한국영화 수작 한 편을 놓치는 우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가 당신은 두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과 한끼 밥값이 넘는 칠천원을 한꺼번에 버렸다고 나를 타박할지도 모른다.

자, 그럼 어떻게 기준을 만들까? 내가 제시하는 기준은 이렇다. 당신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좋게 보았던가? 그렇다면 빨리 극장으로 향하길(아니라면 <조폭마누라>를 권하는 바이다). 이 영화는 비디오로 볼 영화가 아니다. 가능하면 좋은 극장에 가길 바란다. 특히 음향시설이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 거기서 들려오는 대숲의 흔들림, 산사에 내리는 눈, 시냇물 흐르는 소리... 그것만 듣고 나와도 본전은 했다고 느낄 것이다.

게다가 미적감각이 거의 없는 내 눈으로 보아도 이 영화는 아름답다.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와 많이 닮았다. 뭐가 닮았냐고? 아름다운 것이 닮았다. 더 이상 자세히는 묻지 마시길. 학창시절 미술이라면 나는 학을 떼었던 인물이다.(물론 전문가들은 다르다고 한다. <비트>, <아름다운 시절>의 현 촬영감독 김형구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맛이 있단다).

하지만 영화가 그게 다가 아닌 것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이미 가르쳐주었다. 수려한 우리네 강산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던 그 영화는 보기 좋은 미술 작품 이상의 감흥을 내게 주진 못했다. 물론 일인 전역의 슈퍼맨 감독의 존재는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행했던 친구의 눈꺼풀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그럼 무엇이 이 영화를 좋게 만든 것일까. 내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감독의 시각이다. 명쾌한 악인이 없다는 것은 일본 '아니메'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야자끼 하야오의 만화가 대게 그러하듯, 이 영화가 따스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감독이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래 봐야 군대시절 슬리퍼신고 나갔다가 두들겨 맞았던 한 사람 뿐이라니, 이쯤되면 영화 감독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좀 생각해봐야 할 수준이다.

게다가 배우의 연기도 좋다. 키만 크고 멀쑥한 느낌의 유지태는 그야말로 상우이고, 예쁜척한다고 질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인 이영애는 그야말로 은수다. 이야기도 좋다. 영화를 보면서 악역(?)을 맡은 이영애 욕많이 먹겠군, 생각했지만 영화가 끝난 후엔 오히려 연민이 생긴다. 영화를 보며 은수가 헤어지자는 말을 할 때 모두가 "왜?"라고 질문하지만 사실 그 질문은 입밖으로 내 놓는 순간 너무 유치한 질문이 된다. 물론 해답도 없다. 다만 풍부한 여백을 통해 누구나 한 줌의 이유를 맘속에 가지고 나온다. 게다가 영화에 잔재미를 주는, 그렇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기도 한 소위 '잔가지'(서양 오랑캐말로 디테일)들도 반짝 반짝 빛난다. 그건 각자 찾아보기로 하고....

이 영화 <봄날은 간다>는 여러 가지로 이율배반적이다. 두 사람은 사랑한다. 그러나 헤어진다. 이 영화는 멜로다. 하지만 그냥 멜로가 아니다(어떤 의미에서 다 커버린 어른들의 '성장영화'라고나 할까). 두 주인공의 캐스팅은 너무나 상업적이다(소위 스타시스템의 절정이지 않은가? 유지태! 이영애!). 그러나 이 영화는 돈벌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돈 벌려면 이렇게 만들면 안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이 영화는 존재의의가 있다. 한국 영화 극장 점유율 50%를 바라보는 이 때, 이런 영화가 장기 흥행을 한다면 아마 그건 한국 영화의 수준뿐만 아니라 관객의 수준까지 향상되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덧붙임] 참고할 것은 작년 아내 임신하고서 JSA를 온가족이 극장에서 본 이후 첫 번째 극장 나들이였다는 점, 따라서 극장 한 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애기 땜에 꼼짝 못하던 사람의 흥분이 이 영화를 보는데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또덧붙임]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추석 연휴기간 동안 <조폭마누라>가 <봄날은 간다>를 눌렀더군. 음... 역시 대단한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