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20일 수요일

[논문영어] thrive at : 번창하다, 잘 자라다

Grow well 이런 말 쓰지말고 thrive!!!

Pyrococcus furiosus thrives at extreme temperatures

* thrive 번창하다, 번영하다, 무성하다, 호황을 누리다

By studying fossils, paleontologists learn what forms of life thrived during various periods of the Earth's history.
(화석을 연구함으로써, 고생물학자들은 지구역사의 여러 가지 기간 동안에 어떤 형태의 생명체가 번창했는지를 배운다.)


2006년 12월 7일 목요일

엄석대 그 후, 희망은 있는가?

여기 이문열의 소설이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의 글을 빌려서 내용을 요약해본다.

철저한 독재자인 반장 엄석대의 배후에는 그의 `효율적인 통치'에서 득을 보는 담임선생님이 있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5학년에서 6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새로 담임을 맡게 된 교사는 엄석대 식의 강압적인 반 운영을 비판하고 구성원들의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결국 전교 1등의 성적까지 조작하는 엄석대의 음모를 발각해낸 교사에게 매를 맞고 엄석대는 학교를 떠난다. “너희들은 당연한 너희들의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엄석대와 그의 공모자들에게 매를 때리면서 교사가 한 말이다.

여기 유사한 줄거리의 또 하나의 소설이 있다. 황석영. 이문열과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이다. 1972년에 나온 이 소설의 제목은 <아우를 위하여>. 역시 최재봉의 요약이다.

열한 살짜리 주인공 수남의 반에 열다섯 살짜리 영래가 새로 들어오면서 힘으로 반장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다. 가르치는 데에는 뜻이 없고 부업 때문에 밖으로만 나도는 담임선생님은 은근히 영래가 반을 휘어잡는 것을 달가워한다. 그러나 영래의 횡포가 우심해지고, 처음에는 그를 따르던 아이들조차 점차 그에게서 멀어질 무렵, 사범학교 졸업반인 교생 선생님이 부임해 온다. “한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여럿이서 고쳐줘야 해요. 그냥 모른 체하면 모두 다 함께 나쁜 사람들입니다”라는 그의 말에 수남이와 반 아이들은 힘을 합해 폭군 영래를 몰아내기에 이른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두 소설의 얼개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결론이 정반대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마지막 최재봉의 결론이다.

엄석대와 그의 공모자들에게 매를 때리면서 교사가 한 말에서는 앞서 인용한 수남이네 교생 선생님의 말이 겹쳐 들린다. 차이가 있다면 <아우를 위하여>에서는 교생 선생님의 격려를 받은 아이들이 스스로 폭군을 몰아낸 반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교사가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점뿐이다. 두 작품 모두 정치적 알레고리로서의 색채가 뚜렷한데, <아우를 위하여>가 폭군에 맞서는 민중 쪽의 대의에 초점을 맞춘 반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석대가 몰락한 뒤 반 아이들이 보인 행태를 통해 그들의 우중(愚衆)적 면모를 표 나게 드러내고 있다.

(최재봉의 컬럼, “우리들의 진짜 영웅은?” 중에서)

황석영과 이문열. 어느 것이 더 진짜 현실에 가까울까? 난 이문열의 소설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힘센자에게 맞서기 보다는 순응하는 것을 훨씬 보기 쉬운 세상이다. 더욱이 진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허상이었다고 여겨지는 요즘에 말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세상은? 황석영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쉽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렇다. 정점에 몰렸던 권력은 점점 그 영향력이 퍼져가고 있고 민중 또는 대중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어른들이 위아래도 없는 이놈의 세상이 망할 것 같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말이다. 물론 한 때 젊은이들이 꿈꾸었던 꿈, 자유와 희망이 넘쳐흐를 대동 새세상에는 충분히 못 미치지만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시라. 인류의 역사까지 갈 것 없이, 우리의 역사에서 지금처럼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를. 이걸로 만족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언제나 싸움은 이문열(현실)이 이기는 것 같은데 역사의 수레바퀴는 황석영(꿈)쪽으로 굴러오는 것은 사실이다. 희망은 현실이 아닌 현실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영화 쇼생크 탈출을 한 번 더 보시라고 권해주고 싶다. 자유에 대한 희망을 가진 앤디 (팀 로빈스), 감옥의 익숙함에 동화되어 자유를 포기하고 자살한 브룩스, 그 둘 사이에서 앤디의 희망을 선택한 레드 (모건 프리먼)가 앤디와 그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의 “지후아타네호 (Zihuatanejo)”에서 만나는 장면을 말이다.


희망은 우리가 품느냐 버리느냐의 문제이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품는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현실”에 동화되어 있는 사람에게 희망이란 어색한 단어라는 점이다.

바로 그 현실, 이문열이 소설 속에서 현실감 있게 그린 그대로, 엄석대가 사라진 지금 우리의 모습은 완전히 지리멸렬이다. 나눠가진 권력으로 서로 물고 뜯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여와 야가 싸우고, 법원과 검찰이 싸우고, 정치권력과 언론이 싸우고, 친북과 반북이 싸우고, 민중과 우중이 싸운다. 싸움에 진절머리 치는 당신,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것이 현실인 것을. 진정 희망을 잡으려면 그 현실을 넘어서야 하는 것을, 여기서 멈추어선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을, 쉬었다 가더라도 때론 좀 돌아가더라도 진도는 나가야 하는 것을, 말이다.

나에겐 아직도 희망이 있다.

2006년 11월 16일 목요일

그 일본 아저씨는 왜 자살을 시도했을까?

잘못 지적에만 신내지말고 해결책도 좀 신경 쓰자고!.

블룸버그 통신의 윌리엄 페섹이라는 컬럼니스트가 쓴 한국 경제에 대한 컬럼이 오늘은 화제가 되었더군요. 제목은”South Korea Faces Risk of Japan-Like Lost Decade”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같은 위험에 대면하다). 내용은 여러 지면에 보도된 바와 같이 90년대 일본의 장기 불황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접 읽으실 분들은 클릭 하시길…)

그리고 제일 중요한 부분은 역시 이 부분. “Perhaps the biggest risk is policy paralysis (아마도 가장 큰 위험은 정책 마비이다).” 잘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페섹이 어제 한국에 왔다고 하거든요. 머니투데이가 인터뷰를 했다는데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공급확대 정책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페섹은 "공급확대는 단기적인 영향을 줄 것이나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금리인상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미국은 부동산값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려 효과를 보고 있으나 한국은 경제의 효율성 문제로 금리인상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유동성을 줄이는 대안으로 고수익 채권발행과 증시 부양을 들었다. 다만, 한국 증시가 경제 펀더멘털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만큼 증시부양의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와 함께 강력한 세제정책을 주문했다. 매도세 등 세금을 인상하면 사람들이 대출을 받아 집을 사지 않고, 임대로 전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문보기는 클릭 하시길…)

헉! “강력한” 세제정책이라니… 그냥 세제정책도 아니고 말이죠. 지금 나온 정도의 세금정책에도 세금 폭탄이 어쩌고 난리부르스를 추는 신문사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더 강력한 세금정책이라… 예전에 스웨덴의 인기그룹 아바 (ABBA)가 소득의 80% 세금 뗀다고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던 생각이 나는군요. 아무튼 요약하면 금리인상은 반대, 공급확대 (단기적으로), 고수익채권발행과 증시부양, 강력한 세제정책이네요. 뭐 현정부의 기조와 크게 다르지는 않아보이는군요. 시민사회권은 좀 섭섭해할지 몰라도.

그런데 1경원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돈의 가치가 자꾸 올라서 몇 조, 몇십 조까지는 들어봤어도 1경원이라고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제 오마이 독자란에 누가 퍼온 2003년 뉴스를 보니까 일본의 부동산 가격이 12년째 연속 하락하며, 무려 1천조엔(우리돈 1경원)의 재산이 거품으로 사라졌다는 군요. 물론 요즘은 경제가 좀 핀다고 하니 좀 올랐나 모르겠네요. 대체 1경원이 얼마랍니까? 그러고 보니 일본을 팔면 미국을 다 살 수 있다고 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군요.

제 경험을 좀 이야기해보면 제가 동경에 살 때 (8년 전쯤) 저희가 살던 원룸 맨션이 한 7평 정도의 크기인데 월세가 7만4천엔 정도였지요. 그 건물주인 아저씨는 그런 맨션 빌딩 몇 개 가지고 월세만 받아도 장난 아닌 돈을 만지는 분이었는데 5층짜리 건물 하나에 한 층에 3개씩 세를 주니까 한달에 백만 엔 이상이 그냥 들어오는 수입이죠.

그런데 저희가 아는 분 중에 그런 아저씨가 한 분 계셨는데 동경 도심에 8층짜리 빌딩을 소유한 분이셨죠. 그런데 샌님들 같은 동경 사람들과는 달리 간사이 출신답게 호탕하고 언제나 시원시원하던 그 아저씨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몇 년 뒤 출장으로 동경을 방문했을 때였답니다. 알고 보니 역시 대출을 받아서 건물을 지었지만 계속 거품이 빠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건물을 다 팔아도 밀린 이자 갚기도 힘든 지경이 되셨다는군요. 결국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많은 빚을 감당하지 못해서 개인파산신청을 해서 살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 안타깝더군요.

물론 현재의 사태가 1차적으로 정부의 잘못이고 거기엔 변명의 여기가 없지만 페섹의 말한 정책 마비(policy paralysis) 상태를 풀기위해 여러 경제 주체들이 힘을 합쳐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죠. 사실 이 부동산 레이스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사람들은 저소득 무주택 서민들보다는 중산층이라고 볼 수 있지요. 서민들이 뭐 몇 억씩 대출이나 받을 수 있습니까? 결국 중산층의 타격은 더 심각한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구요.

얼마전 읽은 드러커의 유작 <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더군요.

“세상에 비합리적인 고객이라는 것은 없다. 있다면 오직 게으른 제조업자뿐이다. 고객의 행동은 항상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건 지금 정부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동산 레이스에 뛰어드는 국민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들을 믿게 만들어 줘야겠지요. 분명 정책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있고 언론들의 본질 호도 등이 있지만 국민을 탓해서는 안됩니다. 노대통령의 명언 아닙니까, “농부가 밭을 탓할 순 없다.”

반대로 그 책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공공기관의 혁신과 관련해서) 공무원에 대한 비난은 아키아벨리 시절부터 불렀던 한물간 노래이다. 좀 더 나은 사람들이 관료가 되면 해결된다는 식의 생각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부를 두들겨 패고 비난하는 것이 속은 좀 시원할지 몰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어떤 정책도 먹혀들지 않는 경우에 말입니다.

이제 새 대책도 나왔으니 부동산 시장이 좀 진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새 정책이 만능은 아닐 것이고 보완할 것은 보완하면서 말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심상정 의원이 주장하는 다주택자 대출 규제는 좀 했으면 좋겠는데). 부동산에 대한 뉴스를 더 이상은 안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도무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성경의 경구가 날로 가슴에 남는 요즘입니다.


* 글 올리려고 보니까 또 모든 언론들에서 페섹의 컬럼을 요리해서 다들 한소리씩 하셨군요. 조선일보의 사설은 가관입니다. 이 정부가 “잘 사는 이웃집에 벼락이 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빌도록 만들었다는군요. (대체 이런 말이 사설에 쓸 말인가요?) 그냥 닥치고 페섹이 하자는대로 강력한 세금정책이나 하자고 하든지!

2006년 11월 10일 금요일

[논문영어] pose problems : 문제를 야기하다

하루에 논문을 여러편씩 보지만 (전부 정독하는 것은 아니고...)
내용만 신경쓸 것이 아니라 "영어"도 신경써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논문에서 사용되는 영어를 정리해보기로 결정...^^

This lack of regulation also poses problems with purity and quality control.
(make a problem을 쓰고 싶지만 pose a problem... 좋다.)

* pose a problem : (문제를) 야기하다, 드러내다, 제출하다, 내다

The bill would
pose a problem as it would entitle North Korean defectors to job training and other benefits only after they won South Korean citizenship.  (이번 법안은 탈북자들이 남한 시민권을 획득해야 직업훈련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2006년 10월 13일 금요일

손봉호 vs 노무현

일찌기 한홍구 교수가 말한 "참된 보수"를 지금 세상에서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손봉호 교수을 꼽겠다. 선비적인 풍모와 함께 "철저한 원칙론자"인 그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것 빼고 (하긴 요즘은 예전에 안티조선하던 놈들도 쓰는 판이니) 한국 기독교 지성계에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그가 얼마전 동덕여대 총장에서 해임되었다는 뉴스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땅에 원칙론자가 발붙여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만든 이 사건을 당하며 과연 손봉호 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손봉호 총장의 죄목이라는 것, 그건 바로 이땅의 백성들이 현 대통령에게 붙인 죄목과 99% 동일하다. 언론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면 손총장의 죄목은 "재임 후 학교측과 총학생회, 교직원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독단적으로 학교를 운영"해왔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회 갈등 심화, 독단적 운영,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그런데 그 갈등이라고 하는 것이, 총학의 부정선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5명 밖에 되지않는 교수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정 반대편의 과거 재단이사장측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부풀려지고 방관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양 갈등 당사자들의 사이에서 원칙을 지켜보려던 교육자의 파면이 현 대통령의 탄핵사태와 겹쳐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지금 손총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난 그게 제일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또는 이 땅에서 원칙론자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2006년 8월 11일 금요일

두 얼굴의 교육에 대해...

아래 퍼온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우리 교육이 문제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해법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반대의 생각들이 섞여있는 경우를 종종본다. 마치 현정권의 외교가 문제라고 하지만 한쪽에서는 너무 친미라고 하고 반대쪽에서는 반미라고 하듯이 말이다. 언제나 이 두 극단은 상호절충을 모르고 그 상위 권위인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믿듯이 교육에 있어서도 그 두 얼굴이 뚜렸하다.

미국의 교육을 칭송하는 부류들이 가장 내세우는 점은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지옥과 같은 공부와 과외등을 안하거나 덜해도 된다는 점이다. 그저 남(주로 미국인)보다 조금 더해도 좋은 성적을 올리니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적고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논리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와 과외를 안하거나 덜해도 되게 만든 정책이 바로 현재의 정책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학생들의 학력이 낮다느니 이런 소리가 나오고 나보다 공부못하는 애들이 서울대를 가게된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공부잘하는 순서대로 입시사정표의 학력고사 커트라인 순서에 맞게 가야지 3등한 나는 한양대가고 4등한 놈이 서울대가는 꼴은 못보는 것이 아닐까?

즉 그 두얼굴이란 내아이가 공부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좀 행복했으면하는 심리와 그래도 공부잘하는 놈부터 순서대로 서울대를 가야한다는 입시위주의 심리가 상충된다는 것이다. 물론 중압감없이 행복하게 공부해서 서열별로 대학가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 서열이 완화되지 않는 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어디서나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적어도 대한민국의 10개 또는 그 이상의 대학 졸업장이 거의 동등하게 대우받지 않는 한, 그 서열이 살아있는데 입시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고 입시가 우선되면 교육이 정상화될 수 없다... 는 것이 얼마전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눈 다음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