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7일 일요일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통하였느냐..." (나와 우리의 소통에 대하여)

"통하였느냐..." (나와 우리의 소통에 대하여)

간만에 시간을 내서 영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Lost in translation)>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고른 첫번째 이유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2003년 헐리웃을 가로지른 <매트릭스>, <킬빌>, <라스트 사무라이> 등을 보면서 최근 헐리웃에서 왜 그렇게 일본에 관심을 가지는지가 궁금했었습니다. 두번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1순위라던 빌 머레이의 연기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숀 펜에게 상을 빼았기자(?) 사회자 빌리 크리스탈이 “Don’t go, Bill, We all love you!”라고 했던 말이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세번째는 아마도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각본상을 휩쓴(반지의 제왕이 후보에 없었으니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가 감독을 했다는 호기심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영화였습니다.

평론가들에게 평균 별 넷을 받은 영화답게 약간은 지루한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감히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루한 여백을 나름대로 잘 메워줄 화두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화두는 바로 ‘소통’입니다. 이 영화는 소통을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 그거였구나’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 다시 한 번 보면 더 그 의미가 명확해지는 영화를 오랜 만에 만났습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소통이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일단 언어가 다른 물리적인 공간, 일본에 1주일 머무는 사람들 입니다. 소통의 방식이 다른 곳에 온 것입니다. 전세계에서(아마 잘 사는 나라 중에 그렇다는 거겠죠) 영어가 제일 안통한다는 바로 그 나라 말입니다. 영화는 계속 영어와 일어가 전혀 맞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줍니다. CF감독의 무수한 말을 한 줄로 설명해내는 통역이나, 병원에서 질문에 상관없이 일본어로 열심히 설명해주는 자원봉사자의 모습은 뜨악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언어가 같다고 소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소통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혼 25년을 맞은 빌 머레이는 아내와 소통이 안되고, 이제 결혼 2년된 스칼렛 죠핸슨도 남편과 도대체 소통이 안됩니다. 빌 머레이의 아내는 시차가 정반대인 일본을 생각못하고 남편이 자는 시간에 팩스를 보내옵니다, 관심도 다릅니다. 카페트 색깔을 어떻게 할까에 대해 그는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스칼렛 죠핸슨의 남편은 너무 일에 바빠 자기 아내를 혼자두기 일 수 입니다. 같은 영어를 써도 대화가 겉돕니다. 그러니 밤마다 호텔 바에 나와서 혼자 위스키나 마실 밖에요.

그러다 둘은 우연히 합석을 하고 서로를 알게 됩니다. 여기가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갈라지는 지점인데 <러브 어페어>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는 달리 이 영화는 이 둘이 서로 좋아하게 되는 것인지 사랑에 빠지는 것인지조차 애매합니다. 마지막 귓속말을 관객에게 들려주지조차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둘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서로 통했다는 거죠. “통하였느냐”라는 광고 카피는 이 영화에 사용됐어야 했습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정체불명의 제목은 그만두고 말이지요.

제가 말끝, 또는 글끝마다 조선일보에 대해 타박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문제)가 우리사회의 의사소통의 통로를 근본적으로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최근 한국 사회의 분열(?)에 대한 우려의 근본에 바로 이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일보에서는 마치 이 문제를 일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준동으로 왜곡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정치뿐만이 아니라 사회, 교육, 문화, 종교 전반에 걸친 소통의 메커니즘 문제입니다.

그 일례로 노무현 대통령이 잘못했다는 그 ‘부적절한 언사’들의 대부분을 직접 동영상으로 거의 빠짐없이 보고 들은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부적절한 언사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이 신문 기사화 되면 아주 요상하게 바뀌어 버립니다. 전혀 주제와 상관없는 하나의 발언이 문제가 되고 논쟁이 됩니다. 아직도 대통령이 가장 잘못했다는 것이 그 어떤 정책적인 것도 아닌 ‘언사’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소통의 통로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소통은 어렵습니다. 소통은 말이 통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 안통한다고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영화에서 가장 지루한 장면이었던 일본 재즈연주자들과의 술집 장면이나 가라오케 장면은 말은 잘 안통하지만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완전한 소통을 나타내지는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말이죠.

이 영화를 보다가 <공동경비구역 JSA>가 생각났습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어느 면에서 소통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종반에 끝까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이영애에게 유엔군 장군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판문점은 진실을 감춤으로서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게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관통하는 소통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소통되지 않으면서 소통한 척 하는 것, 또는 거짓으로 소통하는 것 말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월간조선과 인터뷰한 기사 제목이 “순진한 휴머니즘으로 남북 분계선을 넘으면 인생이 박살난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여서 곤욕을 치룬 적이 있습니다. 하도 어이없는 질문만 하길래 농담 삼아 한 단 한마디가 제목이 되었답니다. 이게 그네들의 방식입니다.^^)

기자들이 대통령을 데려다 어느 당을 지지하냐 지지할거냐 물어놓고 우리당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더니 탄핵을 하겠답니다. 정범구 의원이 고백했듯이 과거 대통령들이 소위 유명인사들을 독대하고, 선거에 나가라고 해서 공천주고, 자기 국회의원 만들었어도 아무 문제 삼지 않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결국 대통령이 누구를 지지할 지 누구나 다 알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그들이 원하는 소통 방식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제 그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게시판에서, 그리고 블로그에서 과거에 감추어졌던 개인의 생각들이 수도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매개체(미디어)를 통하지 않고 이젠 직접 소통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받아 들이느냐 아니냐,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존중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사회적인 측면이 아니고 개인적인 측면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외국에 살면서 사람들이 받는 최고의 괴로움이 바로 이 ‘말’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받는 상처의 대부분도 바로 이 ‘말’ 때문이구요. 뭐 모국어가 없는 세상에 사는 괴로움이야 북한에 갔다가 독일에서 생활하던 황석영씨가 구속을 각오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말’이 소통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나 선교단체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나 소위 뒷다마까는 것 문제다라고 하지만 결국 저만 봐도 자기 이야기보다는 남 이야기를 더 하는 듯합니다. 문제는 외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상태에서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더 강하다는 것이죠. 연고주의 나라 대한민국의 초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참 친한 것 같으면서도 “정말 저 사람이 나를 신뢰하나?”하는 느낌들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애기 때문에 교회 구역예배 참석도 어렵고 사람들과 대화할 시간 조차 내기 어려울 때는 더욱 그런 것도 같구요.

공간적, 시간적, 심정적 제약으로 소통이 안되는 사람 둘이 만나 '통하는' 영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Lost in translation)>이 좋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생각들을 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죠. 아무튼 제대로 소통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게시판에 이런 글을 끄적거리는 이유도 그때문이니까 말입니다.

2004년 1월 13일 화요일

반지의 제왕

그 유명한 반지의 제왕을 보다. 1편 부터 3편까지 약 3번씩 보았으니까 3시간씩만 잡아도 27시간을 본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앉아서 본 것은 아니고 애기 안고 트름 시키면서도 보고 밥먹고 잠깐 쉴 때도 보고, 하은이랑 놀면서도 보고 했기 때문에 3번씩 보게 되었다. 이제야 줄거리와 등장인물이 대충 한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나는 다분히 줄거리 중심적인 사람이라(일하는 것도 그렇다) 드라마를 안보는 데, 그 이유가 한 번 빠지면 자꾸 몰입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이렇게 한번에 몰아쳐서 보는 것을 더 선호한다. 아무튼 해적판으로 보는 것으로는 성이 안차서 극장에 가서 3편(왕의 귀환)을 보고 왔더니  맘이 좋다. 역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그러려면 애봐주는 극장이 많이 생겨야 할텐데… (대전의 한 극장에는 그런 시설이 있었다) 암튼 덕분에 미국와서 극장엘 다 가봤다.

잠시 동안이나마 반지의 제왕에 내가 빠진 이유는 뭘까? 아마 그건 반지를 버리는 영화였기 때문이리라. <매트릭스>를 일본 애니메이션의 계보로 풀기도 하고 양자역학으로 풀기도 하듯이,  <반지의 제왕>도 보는 사람에 따라 <스타 워즈>와 대칭되는 SF 환타지이기도, <코난>과 같은 무협 활극이기도 하다. 내용으로 보자면 주인공 프로도의 충직한 정원사 샘 와이즈 갬지의 성장영화이기도 하고 어느 인터뷰를 보니 드물게 동성애적 코드의 영화라고도 하나 보다. 그러나 아무튼 내게 이 영화가 가장 색다른 영화인 것은 이 영화가 반지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 아니고 반지를 버리러 가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는 아마 우리 랩의 미국인 친구가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이 유명한 기독교 소설가인, 그러나 솔직히 이름 말고는 아는 게 없는, CS 루이스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요즘 노래 부르는 재미가 쏠쏠한 우리 큰 딸이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을 내 주위에서 들려준다는 것하고.

아무튼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이 영화가 소위 ‘절대 반지’를 찾으러 떠나는 영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왠걸, 내용은 그 반대로 악의 손에 들어가면 안되는 그 반지를 악의 소굴 한 복판에 가서 내던지고 오는 영화였다.

누구나 손에 넣기를 원하고 손에 넣으면 소유하려는 그 반지는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 ‘권력욕’일 수도 있고 현대 사회의 우상인 ‘경제력’일 수도 있고 조금 다른 종교적 버전으로는 ‘과학기술’일 수도, 혹은 또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인간, 또는 이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어디 한 두개라야 말이지…

아무튼 재미있는 것은 이 반지를 버리기 위해 선택된 사람(?)은 다름아닌 호빗이라는 점이다. 죽었다 살아나는 대마법사 간달프도 아니고, 용맹스러운 인간 아라곤도 아니고, 요정인 엘프도 아니다. 가장 작고(원작에 따르면 키 70cm정도) 보잘것 없는,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도 아닌, 그러나 음주 가무를 즐기고 언제나 낙천적인 존재인 호빗이 반지의 운반자다. 왜 그럴까? 뭐 작가가 재미로 그랬다면 할말 없지만, 어쩌면 기독교적인 사상에 정통한 작가가 호빗을 택한 이유는 그들이 가장 욕심없고 평화로운 세상 샤이어를 이룬 존재들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천국은 바로 그런자들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뭔가를 소유하면, 이라는 조건절로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행복은 만족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지 만족할 조건을 달성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자족이라는 것이 나의 수준에만 머물지 말고 우리의 수준으로 확대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나에게 반지는 무엇일까…

반지의 제왕을 꼭 책으로 한 번 읽고 싶다. 영어책 말고…^^


[덧붙여] 좋은 한해, 평안가운데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