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13일 토요일

이승엽 파동을 보고 - 시스템을 받치는 인프라의 중요성

보스톤 vs 양키스 이야기에 이은 두 번째 야구 이야기입니다. 올 겨울 스토브 리그의 최대 관심사인 이승엽 선수가 일본 퍼시픽리그로 진출한다는군요. 메이저리그를 향해 달려가 봤지만 올 시즌 홈런 56개로 아시아 신기록(?)까지 세운 선수에 대한 대접이 영 시원찮나 봅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도 자존심 팍팍 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자존심 상할 일일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그 전에 한가지! 저는 이승엽 선수에 대한 평가나 예측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야구가 아무리 데이터의 게임이라고 해도 예측이라는 것은 점치는 것과 같아서 틀리기 일쑤입니다. 뒤돌아보면 누군가 맞춘 이가 있기는 해도 말입니다. 한 예로 이찌로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무렵 NHK에서 이찌로에 대한 특별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마지막 순서는 이찌로가 MLB에 가서 어느 정도 실력발휘를 할 수 있을지 야구평론가, 현역 야구 감독(요꼬하마의 곤도 감독), 연예인들이 예측을 하는 것이었는데 야구 전문가들은 대부분 2할 8푼 내지는 잘해야 3할 정도 할 것이라고 한 반면 연예인 중 하나는 3할 3푼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해 이찌로는 3할 5푼으로 MLB 사상 두 번째 신인왕과 시즌 MVP를 동시에 수상합니다. 어처구니없게 연예인의 예측이 실제 결과에 가장 근접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승엽 선수에 대한 평가나 예측이 아닌 그 이면을 좀 보자는 겁니다.

왜 미국넘들이 우리 야구를 인정 안해 줄까요. 그건 인정할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MLB에서 일본 야구는 상당히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일본의 야구 스타들이 MLB에 와서 예상을 뛰어넘는 호성적을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의 야구 스타에 대한 평가는 박합니다. 성공사례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재목을 데려가 키워서 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다고 봅니다. 야구에 있어선 대한민국 최강 학번이라는 막강 92학번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정민철, 박재홍, 차명주, 안희봉 등등) 대열에서 결코 선두라고는 할 수 없었던 박찬호의 성공을 필두로 김병현, 최희섭, 서재응, 봉중근을 비롯하여 모두 유망주들을 일찍 데려다가 키워내는 쪽이 나았습니다.

게다가 한국 야구 선수들, 고교 때부터 혹사당해서 선수생명이 짧습니다. (이건 일본도 만만치 않습니다. 마쯔자카는 200구를 우습게 던지더군요). 일전에 말했지만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는 선동렬보다 한 살 위입니다. 올해 MLB MVP를 3년 연속 수상한 배리 본즈는 장종훈보다 4살이 많습니다(약물 복용의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우리 프로리그에서 9년 뛰고 난 다음에 MLB를 가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 가지 말라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게다가 이승엽은 파워히터인데 마쯔이 히데끼의 전례(한 시즌 홈런 16개)로 보아 동양 선수의 파워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런 것은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 즉 일본 야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을 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도 야구에 관심 있는 분들은 대부분 아시는 것입니다만 말입니다.

한 때 온 나라를 농구의 열풍에 빠지게 만들었던 만화가 있습니다. 이노우에 다케히꼬의 <슬램덩크>입니다.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윤대협… 이젠 전설이 되어버린 이 만화의 주인공들입니다. 이 미워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들의 향연과 숨막히는 승부 이면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숨어있습니다.

<슬램덩크>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된 만화입니다. 중간에 쉰 기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려 6년 동안 연재된 이 만화의 내용상의 기간은 겨우 3개월 남짓입니다. 강백호의 고등학교 입학, 도내 예선, 도내 결선, 전국대회 출전 후 3차전 탈락!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채치수는 대학 간다고 농구를 그만둡니다.

다시 농구에서 야구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어렸을 적 독고탁이 나오는 이상무 화백의 만화에서 보았던 갑자원 대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발음으로 고시엔이라고 불리는 이 대회는 약 4,000개 이상의 팀으로부터 예선을 통해 32개 팀을 선발하여 벌이는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입니다. 흔히 꿈의 대회라고 불리는 이 대회에 한번이라도 참가하기 위해 4,000여개 팀의 선수들이 땀을 흘립니다(일본의 고교 야구대회는 봄여름의 두 대회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네들이 밥만 먹고 야구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전국의 거의 모든 학교에 다양한 종목의 운동부들이 있고, 누구나 하고 싶은 운동을 하고, 그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소위 그 종목의 명문고로 진학을 하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계속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다가 각자 적성과 형편에 맞게 사회에 나가는 방식입니다. 한 학년에 10명씩의 선수가 있다고만 해도 1년에 5만명 이상의 야구선수 출신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 중에서 대학이나 프로에 진학하는 것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그 나머지들이 계속 야구를 보고 즐기고 받쳐주는 버팀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국에서 열린 2002 한일월드컵기간에도 야구가 축구보다 더 인기 있는 나라, 일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일본 야구 인프라의 한 단면입니다.

인프라(하드웨어)가 있어야 시스템(소프트웨어)이 제대로 작동합니다. 인프라가 없이 시스템만을 가져오는 것은 마치 486컴에다가 윈도즈XP 프로페셔널을 돌리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날 뿐입니다. 여기저기서 이런 제도, 저런 제도, 좋다는 것은 무조건 수입해다가 시도해 보는데도 다 문제투성이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스템이 돌아가는 환경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강점은 시스템보다는 인프라에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일본의 시스템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랑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네들도 변화를 상당히 싫어합니다. 바로 이런,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하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지금 일본이 장기불황에 허덕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모습을 아주 잘 풍자한 영화가 <춤추는 대수사선2>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시스템을 잘 풍자했지만 일본의 한계를 또한 잘 보여줍니다.

1999년 일본의 경제평론가라는 오마에 겐이치가 IMF 탈출을 위해 진력을 다하는 우리 정부에 직격탄을 날립니다. 제목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다시 설 수 없는 이유>. 요지는 이런 겁니다. 한국은 일본의 하청업체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의 시스템과 유사하다(재벌체제 이런 것), 미국과 일본의 경제 시스템은 다르다, 한국은 일본에 붙어라, 미국에 붙으면 황새 흉내낸 뱁새 마냥 가랑이 찢어지는 수가 있다. 이 센세이셔널한 글 하나로 우리나라 조폭언론들과 한나라당에서 얼마나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이 오마에 겐이치라는 인간으로 말하자면 망언제조기 동경도지사 이시하로 신따로나 <전쟁론>의 고바야시 요시노리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입니다. 그가 쓴 글이 실린 잡지 <사피오>는 일본 (극)우파의 정론지, 말하자면 일종의 <월간조선>이죠. 아무튼 자기네 시스템을 따르라던 일본은 지금 10년이 넘는 장기 불황, 이 모양 이 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일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상대인데 그 이유는 과거 그네들의 금력으로 쌓아올린 인프라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차범근 감독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그가 독일에서 오자마자 한 일이 유소년 축구라는 것, 어린아이들이 축구 하는 구석에서 망치 들고 얼음을 깨고 있는 그 한 장의 사진을 보신 분이면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미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또는 진출한 많은 야구 선수와 코치들을 봐 왔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심각한 자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아니 자각은 하겠죠.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고치기 위해 나서지 않는 듯합니다. 드러나는 일도 아니고 돈도 안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고 외면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럽다고 욕하기는 쉬워도 그걸 청소해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청소하고 새로운 구조,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참여도 해야 합니다. 물론 비판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비판이 참여는 아닙니다. 참여해서 공고한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차떼기 하는 도둑놈들,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저 정치모리배들, 땅따먹기 정치하는 인간들이 발붙이지 못할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스타일 좀 구겨지더라도 말입니다.

[추신] 이승엽 선수가 일본으로 진로를 돌렸다니 (일시적일지 몰라도) 일본에 가서 꼭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열심히 운동을 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과 함께 좋은 안목도 길러오시기 바랍니다. 미래를 배워 오십시오. 그게 당신을 떠나보내는 국내 야구팬에 대한 당신의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2003년 10월 20일 월요일

보스톤 대 양키스 AL챔피언십 7차전을 보고

뉴욕. 명실공히 미국의 상징 도시입니다. 오죽하면 알카에다의 공격 목표이겠습니까. 경제와 금융의 도시이며 행정수도는 워싱턴 DC이지만 실질적인 미국의 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맨하탄, 브로드웨이… 뭐 더 이상 설명은 무의미 할 정도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보스톤. 메이플라워호와 함께 미국 역사가 시작한 뉴 잉글랜드(메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코네티컷주)의 대표적 도시입니다. 미국의 역사가 시작했다는 자부심이 무척 강하고 MIT, 하버드, 예일(예일은 코네티컷이지만) 등 소위 미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대학들이 모여있는 미국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뉴욕 양키스. 자타가 공인하는월드시리즈 우승 26회 경력의 미국 최고의 프로야구팀입니다. 어딜가나 팬이 많지만 안티 팬들도 많습니다. 일본의 요미우리처럼 돈으로 야구를 한다는 비난이 있지만 미국인을 양키라고 하듯이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팀입니다.

보스톤 레드삭스. 양키스와 같은 지구에 속에 언제나 2등의 수모를 당했던 비운의 팀입니다. 베이브 루스를 양키스에 팔아먹었다가 1918년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우승을 못한 ‘밤비노의 저주’가 유명합니다. 때문에 양키스에 대한 깊은 경쟁심을 갖고 있습니다.


로저 클레멘스. 1984년 보스톤 레드삭스에서 데뷔해서 보스톤에서 뛴 13년 동안 3회 사이영상을 수상한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습니다. 토론토를 거쳐 99년 보스톤의 숙적 양키스에 입단하였고 97, 98년 토론토에서 두 번, 2001년에 양키스에서 다시 사이영상을 수상, 생애 6번 사이영상의 영예를 안은 일명 로켓맨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를 때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오르겠다고 보스톤의 염장을 지른 당대 최고 투수입니다. 참고로 1962년 생으로 선동렬보다 1살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17승이나 올렸습니다(선동렬 선수의 실제나이는 호적과 다르다는 설이 있지만 어쨋든 부럽습니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로켓맨의 뒤를 이어 보스톤의 최고 에이스로 떠오른 일명 외계인입니다. 박찬호보다 2년 먼저 LA 다저스에서 데뷔했고 몬트리올을 거쳐 보스톤 레드삭스에 입성했습니다. 1999년, 2000년 연속 2회 사이영상 수상자이고 보스톤 마운드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이상하게 올해는 페드로만 나오면 방망이가 침묵해서 14승 밖에 못했지만 방어율 1위로 자기 할 몫은 하고도 남았습니다. 일부 팬 및 언론과 사이가 엄청 나쁘고 인터뷰도 안하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올 시즌을 끝으로 보스톤을 떠난다고 합니다.


자, 이정도 설명을 드렸으면 어제 MLB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쉽 7차전이 얼마나 야구팬들에게 흥미를 끌었던 경기인지 좀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거 그다지 흔히 찾아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우리야 김병현이 나오느니 안나오느니 이런게 관심이지만 얘네들 사실 그런 거 신경도 안쓰는 분위깁니다. 물론 좀 지나면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결국 어제 경기를 진 것도 일정부분 보스톤 불펜의 탓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랜 야구팬으로서 저는 어제 경기에서 너무나 인상 깊었던 것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제가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의 김재박이 7관왕 하던 시절부터 한국, 일본, 미국 야구를 모두 골고루 꽤 많이 본 사람이지만 어제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첫번째는 로저 클레멘스가 4회 아웃카운트도 하나 못잡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순간이었습니다. 4회초에 4대 0이면, 그것도 상대투수는 당대 최고라는 페드로, 누구라도 이 순간에는 ‘졌다!’는 느낌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뉴욕의 팬들 전원이 기립해서 4점이나 주고 노아웃에 1, 3루에 주자를 둔 채 마운드를 내려가는 마흔 한 살의 노장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아, 그 광경을 제 글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표현을 그 때 쓰는 것이던가요.

김병현이 가운데 손가락 쳐들었던 상황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물론 야유를 하건 응원을 하건 그건 모두 팬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전 관중이 하나되어, 객관적으로는 승리가 가물가물하던 그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않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쓸쓸한 노장 선수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그 양키스 팬들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싶습니다. 비록 제가 양키스를 좋아하지도 응원하지도 않았지만 말입니다.

아무래도 보스톤의 팬들하고 비교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일부이지만 극성스런 팬들, 걸핏하면 죽인다 살린다 하고, 언론은 그걸 확대 재생산하고 불을 지피는 환경 속에서 누가 신나서 플레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꼭 우리나라 정치상황하고 비슷하지요. 어제 끝내기 홈런으로 양키스의 승리가 결정되고 온 선수들과 관중이 환호하는 장면을, 동료 선수들이 다 떠난 덕아웃에 혼자 앉아 뚫어지게 쳐다보는 페드로의 얼굴에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이 겹쳐 보였던 이유가 그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나라 찌라시들 보스톤 언론을 맨날 깝니다. 널뛰기하는 보스톤 언론, 김병현 죽이기, 어쩌고 하지만 사실 그게 자기 동료기자들 모습인지는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인상 깊었던 얘기는 바로 그 언론이야기입니다. 어제 피말리는 연장 11회말, 대주자로 나왔다가 타석에 들어선 애론 분이 끝내기 홈런을 칩니다. 기뻐하는 선수들, 환호하는 관중, 마운드에 철퍼덕 쓰러져 우는 마리아노 리베라… 저는 그 장면을 너무 생생하게 듣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았냐구요? 올해 포스트시즌을 단독 중계하는 폭스 TV의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무려 5분 정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화면만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방송에서 3초 이상 말이 안나가면 방송사고라지요? 그런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려 5분 가까이 그들은 아무말도 않고 화면과 현장의 소리만 내보내더군요.

왜 그들이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너무나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관중들과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환호성과 울음소리는 그 어떤 멘트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현장의 목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록 제가 응원하던 팀이 너무 안타깝게 지고 말았지만 그 속에서도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 컴퓨터에는 2002년 월드컵 8강, 4강 결정 당시의 장면을 담은 동영상 화일이 있는데, 방송 3사 모두 아나운서, 해설자가 서로 한마디라도 더하려고 자기들끼리 떠들던 모습과 사못 대조적입니다. 아, 그 송재익, 신문선 콤비의 시끄러움! 뭔가 비장한 문구를 잔뜩 써와서 읽어 내려가며 차범근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던 임주환 캐스터의 모습이라니!

언론이란 뭘까요. 미디어라는 것이 매개체 아닌가요? 그런데 우린 언론은 자꾸 자기 목소리를 여론에 실어 보내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민들은 오히려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데 말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중립은 없고 언론이 자기 목소리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언론을 언론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점검이 있고 자기 혁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언론이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방식은 우리처럼 정치판의 주인공으로 뛰어드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언제쯤 우리가 그런 언론 환경 속에 살 날이 올까요.

보스톤이 리드하고 있어도 제가 불안했던 이유는 밤비노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경기 내내 화면에 비춰주는,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팬, 모자를 눌러쓰고 차마 경기장을 응시하지 못하는 팬, 간절함이 얼굴에 가득한 그러면서도 야구를 즐기는 팬들의 모습을 보고서 입니다. 그들의 염원이 하늘을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승리는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승리의 기쁨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감히 여기에 노무현을 사랑하는, 또는 지지하는 사람들(노사모이건 아니건)의 모습을 비춰봅니다. 우리도 저런 환경, 저런 여건 속에서 싸운다면 넉넉히 이기고도 남을 텐데, 그러면 좀 더 나은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편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만 해준다면, 솔직하게 현장의 소리만 들려준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경기가 접전일 수록 승리의 기쁨도 큰 법! 그럴 수록 다시 힘내서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으로 졸필의 끝을 맺겠습니다.

평안을 기원하며

2003년 6월 28일 토요일

오아시스, 우린 다 병신이다!

간밤에 끄적였던 글을 다 지웠다. 그리고 다시 쓴다. 제목을 바꿀 생각이다. "우린 다 병신이다~". 그래 이게 좋겠다.

'병신'이라는 말 쓰면 안되는 말이다. 일본에서 놀랐던 것이 있다. 주변에 일본어 잘 하는 사람에게 물어 보라. 장님이 일본말로 뭐냐고. 아마 잘 모를 것이다. 그럼 앉은뱅이는? 이런 말을 차별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런 차별어를 사회적으로 안쓰기로 했고 점점 없어져 간다고 한다(뭐 찾아보면 없지는 않겠지만). 전 세계에서 욕이 가장 발달했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떤가? 그건 애들만 보면 안다. 애들이 다른 친구들을 놀리는 말. 이거 거의 전부 차별어다. 하다못해 '숏다리'까지 나왔다. 작년에 한겨레에 어느 목사니이 차별어 쓰지 말자는 운동을 하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아무튼 '병신'도 차별어가 된 말이다. 원 뜻이야 '병든 몸'이라는 뜻일지 몰라도. 따라서 이런 말도 안 써야 된다. 하지만 이 말 말고 다르게 표현할 방도를 못찾겠다. 그러니 한 번만 양해를 구한다. <오아시스>는 말한다. 우린 모두 병신이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고 봤다. 이 영화가 스펙터클 영화라서가 아니다. 문소리가 연기하는 한공주를 들여다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게 쥐어짜며 이야기하는 그 내용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하니 나도 한공주처럼 발이 꼬이고 팔에 힘이 들어간다. 이게 신체적인 불편함이라면 내용도 불편하다. 사회부적응자와 지체장애인의 사랑.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있을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더 불편하다. 그래, 사실 우린 우리와 다르면 불편하다. 간밤에 썼던 내 글을 다 지운 이유가 바로 이 문장 때문이었다. "우린 나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감독의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나온 '범주' 또는 '경계'의 담론이 주는 유익을 이 영화에서 발견한다. 대체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정상인이란 말인가. 사실 모두 장애인이고 모두 정상인이다. 그래 맞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사실 생각이 조금만 있다면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영화에서는 누구도 악인이 아니다. 마치 몇몇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동생을 이용해 아파트를 얻은 오빠는 나쁜놈일까? 아니다. 그래도 생일이라고 찾아오고 2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그의 이름은 한상식이다. 그게 우리의 상식이라는 말이다.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동생을 대신 깜빵에 보낸 형은 나쁜 놈일까? 아니다. 그래도 그 형은 끝까지 동생을 사람 만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형수가 삼촌 설경구의 무릎에 옥도정기를 발라주며 하는 대사는 이 영화의 압권이다. '난 삼촌이 정말 싫어요. 삼촌이 제발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형수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반인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거면 아예 집으로 들이지도 않는다. 카센터에서 자는 것도 불안해서 그냥 두지 않았을 거다. 그건 정말 사회부적응자를 둔 가족의 모습이다. 악한도 그렇다고 선인도 아닌 딱 그만큼의 우리 사람들 모습이다.

선인도 악인도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우리 사회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소외당하고 우린 살아간다. 그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성찰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여백을 이 영화는 관객에게 선사한다. 이 영화가 무슨 계목영화가 아니다. 그건 그냥 여백일 뿐이다.

문소리가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건 말건, 이 영화의 장르가 멜로건 판타지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건 말건 아무튼 오아시스는 봐야 되는 영화다. 영화가 재미있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오해서도 아니다. 영화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문학가 출신의 감독이 우리 사회에 보내는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권하는 바이다.    

[덧붙여]
솔직히 내 취향엔 <박하사탕>의 울림이 더 크다. 그건 아직도 나의 사고의 기준이 과거에 많이 붙잡혀 있다는 것일 게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박하사탕>과 비슷한 다른 영화다. 삶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하고 이야기에서 다르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가장 많은 의문을 가졌던 내용이 바로 자신을 범하려던 홍종두에게 전화하는 한공주의 설정일 것이다. 그냥 내가 이해하기로는 자신의 집을 무단침입해 자신을 거의 무시하고(마치 애완동물을 보듯이) 사랑을 나누는(?) 옆집 부부와 자신을 이용해 아파트를 당첨받고도 자신을 데리고 가서 이용해 먹은 오빠에 대한 실망과 외로움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