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16일 금요일

나의 어머니 이야기

우리 가족이 그래도 이만큼 살아온 것은 순전히 어머니 덕이다. 맘 좋은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 시절 당신 동생에게 전재산(장난 아니게 큰 돈이었다)을 날리셨다. 그리고 또 나중에 형님에게도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빌려드렸는데 큰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것도 없는 돈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날린 돈만 갖고 있었다면 좀 더 넉넉히 사실 수 있을 텐데...

그 와중에 우리 어머니는 악착같이 사는 길이 정말로 사는(생존하는)길이라는 것을 배우시고 이런 저런 일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형제들은 의사에다 교수에다 다 잘나가는데 혼자만 약대에 진학했다가 등록도 포기하고, 6.25때 혼자되신 외할머니를 도와, 위로 형제 둘을 의대 공부시키고, 아래로 동생 둘을 대학 공부시킨 우리 어머니의 그 착한 맘씨 덕분에, 우리 아버지가 그 돈을 다 날리고 길바닥에 나앉게 될 무렵, 우리 가족은 이모, 외삼촌 덕분에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다. 아파트 청소부터 참기름 배달, 카세트 테입 외판원, 출판사 외판원 등등, 결국엔 그런 노력으로 날렸던 집까지 찾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우리 어머니 집안 청소를 해 본 역사가 없는 분이다(누가 오기 전에는). 집안일은 아버지가 대부분 하시는 거고, 어머니는 그저 손가락과 세치 혀로 조종을 하신다. 물론 밖에 나가서는 안 그러신다. 남의 집 김장김치는 다 해주고, 교회에서 일 있으면 죽어라 일하시고는 집에 들어와서는 여왕으로 군림하신다. 물론 절대 자식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 형제가 좀 깨끗한 집에서 살아보자고 온갖 투쟁을 다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니가 해!" 물론 우리도 안했고 이제는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아직도 우리 부부는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 "청소 해 놨어요?"라고 질문하고 어머니는 "우리가 아무 문제없이 사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반문하신다.

이렇듯 집안일에는 별로 신경쓰시지 않는 어머니를 할머니께선 언제나 못마땅해 하셨지만 그래도 하시는 말씀은 "그래도 네 엄마는 재주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건 자식들 3형제가 모두 물고 물리며 돈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신 할머니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꽤 짠돌이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어머니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견물생심이므로 보지 않는 것이 최고다. 또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은 남과 비교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요즘엔 경제 사정이 좀 나아져 달라졌지만 나는 아직도 꼬박꼬박 가계부를 적고 있다(놀랍지?). 다행인 것은 이런 면에서 우리 집사람과 죽이 잘 맞는다는 것이다. 우리 집사람이 만일 이런 면에서 나와 맞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벌써부터 쉬고 계신 아버지 때문에 부모님의 수입은 제로다. 유일한 수입원이 월세 받는 것인데 그게 얼마냐, 월 20만원이다. 아무리 우리 동네가 서울의 유명한 달동네라도 27평짜리 가정주택 2층이 그 정도일 수는 없다. 우리 전에 살던 사람이 전세 5000만원에 살았던 집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은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하은이가 태어나고 우리가 대전으로 이사를 결심할 무렵, 집을 내어 놓는다고 호산나넷에다가 글을 올렸더니 이집트 선교사를 하다가 잠시 귀국한 분한테 연락이 왔다. 1년 동안 살집을 구하는데 가진 돈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한달에 70만원 후원을 받는데 월 20만원 정도면 집세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나머지 가진 돈은 여기 저기서 꿔 가지고 보증금조로 200만원인가 그랬다. 물론 우리 어머니는 보증금 1000만원에 월 30정도를 생각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 분한테 연락이 온 시점이 바로 우리 하은이가 태어난 직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그 분들(사실은 나보다 어리다) 역시 하은이가 태어난 나흘 뒤에 첫 딸을 낳은 상태였는데 그 때까지도 집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산후조리할 곳도 없는 사정이 너무 딱해서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OK 사인이 낳다(아버지가 옆에서 부추긴 것은 당연한 것이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하은이가 건강하게 태어난 것에 너무나 감사한 어머니가 덜컥 '그냥 와서 사시라고 해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분명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1년이 되어가고 그 때의 감동이 식은 며칠 전 어느날. 국내 체류기간이 더 늘어나서 1년 더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두 가지 안을 가지고 2층에 올라 가셨다. 고민을 하신 이유를 말하자면 이렇다.

얼마전 어머니께서 대전에 혼자 내려오셨다. 그냥 하루 자고 가려고 오셨다고 하시더니, 가시는 날 아침 집사람한테는 이야기하지 말라며 나만 조용히 보자고 하셨다. 그러시더니 지금 형편이 어려우니 집에 돈 좀 더 붙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이고... 돈 많이(순전히 내 기준에) 번다는 아들넘이 부모님이 어찌 사시는 지 알지도 못하는 꼴이라니... 그러니 고민을 안하게 생기셨겠는가.

아무튼 2가지 안을 가지고 올라가셨는데 그 하나는 보증금을 조금 더 내는 것이오, 아니면 월세를 5만원만이라도 올려달라는 것이었단다. 그런데 아침 11시쯤 2층에 올라가보니... 그 부부가 커다란 상에 커다란 냄비를 하나 놓고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먹고 있더라나? 어머니는 아무말 않고 "1년 더 사세요"라고 말하고 내려오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얼마전 교회 행사 때문에 산 여러 가지 반찬이며 김치며 여러 먹을 것을 다시 다 싸들고 가서 주고 내려오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내 대답. "그 사람들, 라면이 좋아서 먹고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라고 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만 웃은게 아니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함께 신나게 웃었다. 이래서 때로는 인생이 유쾌하다!

2001년 10월 8일 월요일

봄날은 간다

<잊혀지는 것> by 동물원

사랑이라 말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
뜻 모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속삭이던 우리
황금빛 물결 속에 부드러운 미풍을 타고서
손에 잡힐 것만 같던 내일을 향해 항해했었지
눈부신 햇살 아래 이름 모를 풀잎들처럼
서로의 투명하던 눈길 속에 만족하던 우리
시간은 흘러가고 꿈은 소리 없이 깨어져
서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멀어져 갔지
우 그리움으로 잊혀 지지 않던 모습
우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져 가고
사랑의 아픔도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 가지

사랑이라 말하며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고
길 잃은 아이처럼 울먹이며 돌아서던 우리
차가운 눈길 속에 홀로서는 것을 배우며
마지막 안녕 이란 말도 없이 떠나갔었지
숨가쁜 생활 속에 태엽이 감긴 장난감처럼
무감한 발걸음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우리
시간은 흘러가고 빛바랜 사진만 남아
이제는 소식마저 알 수 없는 타인이 됐지
우 그리움으로 잊혀 지지 않던 모습
우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져가고
사랑의 아픔도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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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이 많은 영화의 장점은 뭘까. 영화를 보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8월의 크리스마스>가 그랬듯이 <봄날은 간다>도 여백이 많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동물원의 <잊혀지는 것> 생각이 났다. 내 대학교 1학년 시절. 드럼의 한박자 인트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 영화와 많이 닮았다. 감독이 변해가는 것을 담고 싶었다고 했던가? 아마 그건 잊혀지는 것과 동의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성공한 셈이다.

여백이 많은 영화의 단점은 뭘까. 아마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아니면 제 관중을 만나지 못하면, 재미가 없다느니,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한다느니 하는 불평이 터져나오고 만다는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어떤이는 재미없다고 '절대' 보지 말라고 했다하고, 어떤이는 '다시는 한국영화 안본다'고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품평만 믿고 영화를 놓친다면 당신은 보기 드문 한국영화 수작 한 편을 놓치는 우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가 당신은 두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과 한끼 밥값이 넘는 칠천원을 한꺼번에 버렸다고 나를 타박할지도 모른다.

자, 그럼 어떻게 기준을 만들까? 내가 제시하는 기준은 이렇다. 당신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좋게 보았던가? 그렇다면 빨리 극장으로 향하길(아니라면 <조폭마누라>를 권하는 바이다). 이 영화는 비디오로 볼 영화가 아니다. 가능하면 좋은 극장에 가길 바란다. 특히 음향시설이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 거기서 들려오는 대숲의 흔들림, 산사에 내리는 눈, 시냇물 흐르는 소리... 그것만 듣고 나와도 본전은 했다고 느낄 것이다.

게다가 미적감각이 거의 없는 내 눈으로 보아도 이 영화는 아름답다.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와 많이 닮았다. 뭐가 닮았냐고? 아름다운 것이 닮았다. 더 이상 자세히는 묻지 마시길. 학창시절 미술이라면 나는 학을 떼었던 인물이다.(물론 전문가들은 다르다고 한다. <비트>, <아름다운 시절>의 현 촬영감독 김형구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맛이 있단다).

하지만 영화가 그게 다가 아닌 것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이미 가르쳐주었다. 수려한 우리네 강산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던 그 영화는 보기 좋은 미술 작품 이상의 감흥을 내게 주진 못했다. 물론 일인 전역의 슈퍼맨 감독의 존재는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행했던 친구의 눈꺼풀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그럼 무엇이 이 영화를 좋게 만든 것일까. 내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감독의 시각이다. 명쾌한 악인이 없다는 것은 일본 '아니메'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야자끼 하야오의 만화가 대게 그러하듯, 이 영화가 따스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감독이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래 봐야 군대시절 슬리퍼신고 나갔다가 두들겨 맞았던 한 사람 뿐이라니, 이쯤되면 영화 감독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좀 생각해봐야 할 수준이다.

게다가 배우의 연기도 좋다. 키만 크고 멀쑥한 느낌의 유지태는 그야말로 상우이고, 예쁜척한다고 질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인 이영애는 그야말로 은수다. 이야기도 좋다. 영화를 보면서 악역(?)을 맡은 이영애 욕많이 먹겠군, 생각했지만 영화가 끝난 후엔 오히려 연민이 생긴다. 영화를 보며 은수가 헤어지자는 말을 할 때 모두가 "왜?"라고 질문하지만 사실 그 질문은 입밖으로 내 놓는 순간 너무 유치한 질문이 된다. 물론 해답도 없다. 다만 풍부한 여백을 통해 누구나 한 줌의 이유를 맘속에 가지고 나온다. 게다가 영화에 잔재미를 주는, 그렇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기도 한 소위 '잔가지'(서양 오랑캐말로 디테일)들도 반짝 반짝 빛난다. 그건 각자 찾아보기로 하고....

이 영화 <봄날은 간다>는 여러 가지로 이율배반적이다. 두 사람은 사랑한다. 그러나 헤어진다. 이 영화는 멜로다. 하지만 그냥 멜로가 아니다(어떤 의미에서 다 커버린 어른들의 '성장영화'라고나 할까). 두 주인공의 캐스팅은 너무나 상업적이다(소위 스타시스템의 절정이지 않은가? 유지태! 이영애!). 그러나 이 영화는 돈벌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돈 벌려면 이렇게 만들면 안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이 영화는 존재의의가 있다. 한국 영화 극장 점유율 50%를 바라보는 이 때, 이런 영화가 장기 흥행을 한다면 아마 그건 한국 영화의 수준뿐만 아니라 관객의 수준까지 향상되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덧붙임] 참고할 것은 작년 아내 임신하고서 JSA를 온가족이 극장에서 본 이후 첫 번째 극장 나들이였다는 점, 따라서 극장 한 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애기 땜에 꼼짝 못하던 사람의 흥분이 이 영화를 보는데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또덧붙임]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추석 연휴기간 동안 <조폭마누라>가 <봄날은 간다>를 눌렀더군. 음... 역시 대단한 한국인...

2001년 5월 11일 금요일

짧은 로마 여행기 (2001-05-11) ; 카타콤베와 성베드로성당

이태리를 다녀 온 것도 벌써 4개월이 넘었다. 난생 처음 이태리를 가서 느낀 점을 간단하게 나마 정리해 보고 싶었다. 로마를 1박 2일 동안 둘러보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카타콤베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 지하교회 무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이다.

카타콤베와 성베드로성당은 정확히 대칭되는 점이 있다. 전자가 공인 받기전 초기 기독교의 모습이라면, 후자는 기독교 공인 후 소위 기독교 시대의 절정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박해의 상징인 카타콤베는 지리적인 위치도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서 한 참을 걸어가야 했지만, 베드로성당은 로마 카톨릭의 본산인 바티칸의 한 가운데 위치한다.

먼저 아침에 카타콤베에 다녀왔다. 유일하게 로마를 돌아다니며 내게 도전을 준 곳이 바로 카타콤베였다. 그 옛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느 부자가 자기 재산을 교회에 내어놓아 지하에 만들었다는 이 지하 동굴은 너무 길이 복잡해서 전문 안내원들이 몇군데만 골라서 보여준다.

사진출처: http://blog.cbkmc.com/blog/index.php?article_id=1350&blog_code=sunghwa


카타콤베 지하동굴의 묘지들



거기에 시신을 두었던 엄청나게 많은 관 모양을 보면서 참 이 사람들은 그 옛날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여기에 피해 들어와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이 로마라는 당시 최고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것을 다 포기하게 만들었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을 떠나 오후엔 성베드로 성당에 가 보았다.  

성베드로 성당 앞에서


저 멀리서도 우뚝 솟아 보이는 성베드로성당



위 사진은 성베드로 성당의 외관이다. 그 앞에 줄서있는 사람들의 크기를 보면 알겠지만 정말 크다. 그 위용에 나는 한마디로 질려버렸다. 그 안에 들어가보면 우리가 말로만 듣던 유명 예술가들의 미술품들이 있는데, 이렇게 높고 큰 건물을 어떻게 지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결코 기분이 좋지는 못하다. 게다가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고 결국은 그것이 개신교와 천주교의 분열(종교개혁)을 가져왔다는 역사를 읽으면 더욱 그렇다. 그 옛날 기독교국가의 모습의 타락을 보면서 나는 대한민국 또는 세계를 기독교 국가화 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그것이 종교가 하나의 제도로만 이루어졌을 때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도 길이 남을 역사적 교회를 짓자며 역삼동에 엄청난 교회를 지었다. 그런데 과연 그 교회를 후손들이 와서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20세기 후반 후반 한국 기독교의 부흥이 멈추고 외적인 물량주의가 판치던 시기, 서울에서 가장 땅값 비싼 곳 노른자위 땅에, 보통 국민학교 운동장보다 큰 주차장을 지하에 완비한, 대통령을 배출한 교회가 서울에 있었단다. 당시 기독교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란다. 뭐 이런 소리를 하지는 않을까? 난 그게 두렵다. 그 멋진 성 베드로 성당을 보고서 우울했던 까닭이다.

[덧붙임]

1. 카타콤베가 로마시대 부자의 개인 묘지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2. 이 글은 천주교를 음해(?)하고자 쓴 것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천주교가 더 사회적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고, 나도 일정 정도 동의하는 바다. 무종교인들에게 질문했을 때 가장 좋아하는 종교도 천주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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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디렉토리를 만들고나서 7년전에 유럽키틴학회에 갔다가 썼던 글을 리바이벌해 봤습니다.  
앞으로 예전 여행 경험들을 정리해보려구요.^^

2001년 4월 25일 수요일

나는 인터넷이 좋다.

“참, 너희들은 좋겠다.”

어제 어머니가 하신 말이다. 어머니께서 뭔가 알아보고 싶으실 때 내가 인터넷으로 간단하게 거기에 대한 정보를 찾아드리면 놀라실 때가 많다. 궁금해도 어디 신문이나 책을 뒤져봐도 알기 어려운 정보를 인터넷을 통하면 빠르고 쉽게 찾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인터넷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속도, 정보, 이런 것은 솔직히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하나가 편해지고 다른 몇가지에서 속박이 생기는 것일 뿐…) “평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고 알아봐야 쓸데 없는 것도 많다.

최근 인터넷에 대한 비판을 최소한 세 명 이상에게서 들었다. 사회가 각박해지고 인터넷 때문에 사람들이 공격적이 되어가고, 뭐 이런 이런 이야기들이다. 맞는 말이다. 소위 포탈이든지 아님 사람 많이 모이는 사이트, 신문사의 의견란 등등 어디든 들어가면 참 가관이다. 서로 죽이네 살리네는 고전적인 것이고 다양한 욕설과 저주, 거기에 선정적인 광고가 판친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그래서 인터넷이 좋다. 하지만 분명히 하자. 욕설과 저주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나한테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딱지를 붙여준 적이 있는데 뭐 욕하고 싸우고 이런 거랑 내가 거리 먼 인간인 것으로 많이들 생각할지 모르겠다. 겉으로 본다면 어느 정도는 맞다. 하지만 그게 사실 나는 아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이런 노래 가사처럼 언제나 나도, 그리고 내 생각에 따르면 어느 누구나, 이런 갈등(?)은 존재한다고 본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사회화 또는 교육이라는 갑옷을 입고 자기를 절제하고 살지만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고 자기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고 자기와 다르면 미워하고 질투하고 사는지 이런 모습이 온라인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적나라하게 들어나지 않으면 문제가 뭔지 잘 모른다. 이렇게 드러나야 그 가운데 뭔가 해결을 위한 노력이 출발할 수 있다. 해결되고 안되고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겉으로는 다들 은혜스러운 척 해도 깊이 들어가면 그 안에는 작아 보이지만 작은게 아니라 다른 모습의 여전한 갈등들이 상존해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못마땅한 것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그것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드러낸다는 것이 상처주기나 욕, 저주의 형태로 나타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안점식 선생님이 우리 사회를 약점 은폐형 사회라고 말한 것은 정확한 진단이라고 본다. 그것이 교회에 마저 널리 퍼져 있다.

사람들이 큰 교회를 점점 선호하는 이유도 밑바탕에 이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큰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최근에 내가 자주가던 게시판들이 거의 모두 썰렁해지고 블로그니 싸이질이니 이런 쪽으로 발길을 다 돌리는 이유도 이런데 있지 않나 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보는 이유는 그런 것들을 꺼내어 보일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한 또는 부여받은 자들이라는 점이다. 회개란 죄를 자백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드러나는 모습이고 그 속의 뜻은 결국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어리석고 못난 자인가를 깨닫고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공개하는, 그럼으로서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단 인터넷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인터넷의 그 혼란과 막되먹음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이게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고. 자위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의 차원에서 말이다.
내가 인터넷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2001년 1월 2일 화요일

선동렬님, 님의 자리가 어색합니다.

선동렬님, 안녕하신지요. 오늘 아침 어느 신문보도를 보니 모 구단에서 지도자수업을 하신다고 하더군요. 이제 그라운드에서 다시 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어쩌면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올 해 야구 안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요.    


지난 30일 신문을 보면서 저는 정말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님께 펜을 들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님이 작년에 귀국하셨을 적에 제가 님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아마 통신상에 올린 글을 [팬들의 선물] 집행부 여러분들이 전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건 기억하지 못하셔도 상관 없습니다만...  


지난 30일 한겨레신문의 스포츠면의 헤드라인은 바로 체육인 290명 “선수협 지지”라는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이제 드디어 선수, 팬, 사회단체에 이어 체육인들까지 나섰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현재의 야구판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없는(또는 적은), 분들의 이름이 대부분이더군요.


그 분들의 지지성명을 결코 폄하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야구판에 몸담은 많은 야구인들은 구단의 눈치만 보고 있다는 아쉬움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그 곳에 님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 조선일보의 스포츠면(선수협 지지성명 기사는 물론 없었지만)의 한 귀퉁이에 실린 님의 기사([스포츠 단신]선동열 KBO위원 군부대 위문)를 보고는 꼭 한 말씀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추위에 고생하는 군 장병들을 위문하신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KBO 사무총장과 나란히 위문품을 놓고 악수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장면보다는, 같은 날 있었던 선수협 지지성명서에서 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저만의 욕심일까요.    


선동렬님. 님은 정말 우리의 국보였습니다. '선동렬 방어율 학점'이라는 말 아시죠? 그 한 마디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의 분단 사실도 모르는 어느 일본인이 님의 이름만은 알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그만큼 님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님이 한국 야구의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님께서 구단과 KBO의 횡포를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님이 주니치에 갈 때, 얼마나 방해가 심했습니까. 아예 처음에는 님을 주저앉혔습니다. 구단과 KBO는 한국 야구 금방 망할 것처럼 굴었었죠. 두 번재 님이 일본진출을 선언했을 때, 팬들만은 아낌없이 님의 해외진출을 팍팍 밀어드렸답니다. 결국은 팬들에게 구단이 졌지요. 하지만 한국 야구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구단은 임대라는 희한한 방식으로 돈 빼먹고 권리 행사하는 짓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고 결국은 님을 은퇴시키고 말았습니다.  


일본 최고의 소방수 다이마진 사사끼가 시애틀에 가서 작년에 신인상을 탔습니다. 만약 님께서 같은 나이였다면 사사끼 정도는 쉽게 제칠 수 있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니, 실례가 될 지 모르지만 박찬호 선수보다도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님의 후배들이 그 부당함을 조금이나마 고치고, 야구 한번 신바람나게 해보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들이 돈 많이 받으려고 그런다구요? 이미 그들은 충분히 받고 있고 선수협 안하고 못이기는 척 회유에 넘어가 주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을 선수들입니다. 그들의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다구요? 아마 평균 93%의 지지를 보내는 국민들이 모두 불순세력인가 봅니다. 선수협을 인정하면 프로야구 망한다구요? 구단들은 셈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적자가 날 수 밖에 없죠. 그리고 이건 거의 협박입니다. 너무 궁색한 변명들 아닙니까.  


님께서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현역 때 선수협이 생겼으면 분명히 말하지만 저도 선수협에 가입했을 겁니다."라고 하셨더군요.그런데 그 날 님은 KBO 사무국장과 군부대 위문을 가셔야 했습니까? KBO 홍보대사라는 직함 때문입니까? 그 직함이 님의 30년 야구인생보다 중요합니까?


우리 팬들은 마운드에서 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당당한 님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님은 바로 우리의 '국보'였기 때문입니다.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라는 말로 그 답을 피하시렵니까. 아니면 우리의 국보 선동렬마저도 KBO와 구단에게 찍히면 지도자 한 번 못해보고 야구계를 떠나야하기 때문입니까.  


지난 99년 주니치 드래곤스의 우승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 해 타국생활의 외로움을 우리 '주니치 3총사' 덕분에 쉽게 이겨냈습니다.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당시 홈련왕 페타지니를 2루수 뜬공으로 잡고 환호하는 님의 모습은 비디오로 잘 간직되어 있고 또한 앞으로도 잘 간직할 생각입니다. 선동렬님, 그렇게 언제나 자랑스럽게 우리의 곁에 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색한 기념촬영 사진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자리에서 님을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훗날 녹색의 그라운드에서 만나면 더욱 좋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