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11시에 있었던 2000 아시안컵 축구대회 일본과 이라크의 준준결승은 축구를 보는 재미를 한껏 느끼게 만들어준 한판이었다. 경기는 일본의 4-1 대승으로 끝났다. 결국 일본과 중국, 한국과 사우디의 4강 대결로 압축이 되었다. 중동팀의 부진과 극동팀의 약진이 두드러진 대회라고는 하지만 역시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화제는 일본 축구의 약진일 것이다.
지난 달 시드니 올림픽 축구 8강전에서 일본은 미국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후반 종료 직전 어설픈 페널티킥으로 동점, 그리고 승부차기에서 일본 축구의 영웅 나카타 히데토시 (23, AS.로마)의 실축으로 4강행이 좌절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대회를 통해 일본 축구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단 한차례 월드컵 출전에 3전 전패, 승점 0, 득점 1, 한국전 역대전적 11승 14무 42패(90년 이후 5승 3무 7패) 이라는 기록들은 이제 장롱 속에나 넣어야 할 듯하다. 어제 이라크와의 준준결승 경기 전까지 일본은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이겨본 경험이 없었다 (역대전적 2무 2패).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93년 10월에 있었던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후반 종료 28초 전에 터진 동점골로 일본으로 하여금 사상 첫 월드컵진출의 좌절을 맛보게 한 팀이 바로 이라크였다. 그러나 어제의 경기는 일본 축구가 이제 확실히 달라졌음을 보여주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흔히들 일본 축구의 고질병이라고 불리는 스트라이커의 부재의 극복이나 개인기와 전술 능력 발전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일본 축구에 대한 투자, J-리그의 활성화, 외국인감독 영입으로 인한 선진기술 획득 등을 그 이유로 꼽는다. 모두 사실이다. 그 외에 일본 축구의 강점은 어디에 있을까.
먼저 두터운 선수층. J-리그 1부에만 16개 팀, 2부에도 11개 팀이 있다. 거기서 엄선된 선수들이기에 선수층이 두터운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스타 플레이어도 많다. 사령관 (일본에서 게임 메이커를 일컫는 말이다) 나카타가 빠진 자리에는 또 하나의 걸출한 미드 필더 나까무라 슌스케(22, 요꼬하마 마리노스)가 있다. 한국 팬들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선수이지만 앞으로 가장 주목해야만 하는 선수임에 틀림없다.
이번 대회에서 일본의 공격은 거의 나까무라의 발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1년만에 돌아온 나나미 히로시(28, 이와타 쥬빌로)와 작년에 당한 큰 부상에서 회복되어 교체멤버로 활약하는 오노 신지(21, 우라와 렛즈)도 있다. 이렇게 중원이 튼튼한데다, 지난 올림픽에서 급성장한 다까하라 나오히로 (21, 이와타 쥬빌로)와 니시자와 아끼노리 (24, 세레소 오사카)가 최전방에서 골을 노린다. 올림픽 예선 당시 숙소를 이탈해서 연예인과 데이트한 죄(?)로 잠시 감독의 눈 밖에 났던 교체 멤버 야나기사와 아쯔시 (24, 가시마 안토라즈)도 뛰어난 공격수이다. 이 외에도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수비진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세대 교체. 미우라 카즈로 대표되던 일본 축구 중흥의 1세대는 이제 국제무대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나나미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조 쇼지 등을 1세대의 끝자리에 넣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세대교체의 주역은 역시 축구 영웅 나까타 히데토시. 사실 현재 일본 대표의 주축들과 나이차이가 없지만 그는 1.5세대로 불려질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출현은 일본 축구의 붐을 몰고 왔으며, 일본 선수로서 세계 축구 최고 리그라는 세리에 A에 진출, 심지어 그의 어록이 출간되고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그는 동세대 젊은 일본 대표들과는 조금 그 궤를 달리한다. 그 이후로 나타난 오노, 야나기사와, 나까무라, 히라세 등등의 선수들이 바로 현재의 일본 대표선수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일본 축구에는 악재도 있다. 몇 년 전부터 J-리그의 몇몇 팀들의 재정 사정이 나빠져 매각을 결정하거나 지방 자치단체에 떼어 넘기려고 하기도 한다. 또한 막대한 자금력으로 데려왔던 초창기의 유명 외국 선수들을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올림픽 출장 후 나카타가 이번 대회 참가를 거부하고 이탈리아로 가버렸다. 트루시에 감독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축구협회와 여전히 사이가 안 좋다. 언제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경질설, 사임설 등에 연일 시달린다. 며칠 전엔 이번 대회가 끝나면 자신이 그만두겠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축구는 근본적으로 스타일이 바뀌었다. 이제 그 심연을 조금 들여다보자.
그 심연에는 '자유와 즐거움'이 있다. 현재의 일본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일본의 젊은 선수들은 상당히 자유분방하다 (나카타가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나올 때 딴 짓 하는 모습을 보라). 즐기면서 축구를 한다. 지나치게 애국심을 강요받지도 않는다. 국내 경기건 국제경기건 일본 축구의 특징을 꼽자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나친 승부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수들에게 큰 부상이 많지 않다.
또한 자유롭게 개인기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개인기의 부족은 개인기를 연마하는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측면보다 그것을 써먹을 기회의 부족이 더 문제다. 개인기로 돌파해봐야 붙잡히거나 걸려 넘어지는 축구에서 누가 돌파를 시도하겠는가. 승부만이 지상과제인 축구에서는 개인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수비 선수들에게 공을 차는 기술보다 상대 주공격수를 따라다닐 수 있는 끈질긴 체력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력과 체력의 부족, 혹자는 이것이 일본 축구의 약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정신력과 체력으로 이기려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 아닐까. 경기는 실력으로 이겨야한다. 예전 어느 축구 해설자는 '좀 거칠게 다뤄서 겁을 줘야 된다'는 말을 거침없이 방송에서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력으로 하는 축구가 아니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일본은 예선 리그 동안 단 2장의 옐로우 카드를 받았을 뿐이다 (이라크와의 준준결승에서 2장을 받았지만...). 나카타는 상대의 거친 수비에도 반칙을 하지 않는 선수로 유명하다. 트루시에 감독이 대 이라크전에 앞선 인터뷰에서 한 말, "필요하다면 일본도 거친 경기를 할 수 있다."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분명히 있다.
부담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기량을 펼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여건. 이것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이다. 축구에 대한 지원과 여건 만들기는 결코 자본의 투입만으로 끝이 아니다. 자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아닌 것이 있다.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국가대표선수들이지만 나는 때로 그들이 불쌍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재미있는 축구를 보기 위한 응원이 아닌, 자아도취적인 승리를 위한 부담만을 안기려했던 것은 아닐까?
오는 26일, 예선에서 일본이 4대1로 이겼던 사우디와 우리와의 준결승이 있다. 우리가 승리한다면 우리는 또 한번의 한일전을 보게될 가능성이 높다. 정말 멋진 경기, 깨끗한 경기, 그리고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줘서 승패를 떠나 박수를 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승리를 거둔다면 금상에 첨화하는 격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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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25일 수요일
2000년 10월 17일 화요일
오래된 정원 (창비, 황석영)
올해 최고의 문제작 하면 바로 이 책일 것이다. <오래된 정원>. 책 선전을 겸해서 있었던 5.18 즈음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그리고 동인문학상 후보작 선정 거부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이 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자 까뮈의 대부(?) 김화영 선생은, 황석영 선생의 선정 거부 선언 후에도 줄기차게 이 책을 추천했다. 그러고 보면 그럴 것도 같다. 예전 김화영 선생의 글에서 드러나는 그 화려하면서도 실제적인 묘사를 닮아보였으니까 말이다.
황석영 선생의 책을 읽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무기의 그늘>, <객지> 정도가 아닐까? 사실 황석영식 글쓰기가 어땠는지 잘 기억 나진 않지만, 이 책 <오래된 정원>은 상당히 독특한 느낌이다. 소위 '황구라' 답지 않다고 느낀 것은 왜일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지리산 자락 마을의 오솔길, 그리고 그 주변에 핀 꽃, 그 주변 마을 등을 한 문장이면서도 한 문단 정도의 길이로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었지 싶다. 그런데 이 소설은 거의 그런 묘사에 있어서 아주 작심하고 한 듯하다. 이야기를 따라가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지겨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일 수도 있겠다. 황석영 선생의 12년만의 장편은 당연히 참여적이고 목적 의식이 충만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지만, 한 번 읽어본다면 이 책이 얼마나 서정적인 글인지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은이는 "서사의 결여와 감각주의라는 중병을 앓고 있는 한국문학이 풍부한 서사를 지닌 남성풍의 문학으로 거듭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 사실 풍부한 서정성과 정밀한 묘사와는 별도의 또 다른 맛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가 주는 힘이다.
이야기는 어쩌면 아주 단순하다. 하나의 문학 작품을 그럴 수는 없겠지만, 잘 추리면 단편 하나의 분량 정도라고나 할까. 80년 광주를 경험한 한 사내와 그가 도피해서 만난 한 여인, 이 소설은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 사내는 18 년을 감옥에서 살아왔고 그 여인은 감옥 밖에서 살았다. 그러나 결말은 감옥 속에 들어가 있던 사내는 사회로 다시 나와서 자신의 삶을 찾고, 감옥 밖에 살던 여인은 그 사내가 살지 못한 삶을 살다가 홀로 삶을 마감한다. 마치 감옥 밖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듯이. 그리고 사회에 복귀한 그 사내가 그 여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내용이다.
그 18년의 기간. 5월 광주로 시작해서 많은 자유와 민주를 향한 투쟁을 거치는 동안 유럽에선 사회주의가 허무하게 무너지는데 절반, 그리고 군사정권이 끝나고 우리나라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일어나 남이 북을, 북이 남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 때까지가 또 대충 절반이다. 그동안 세상은 너무 바뀌었다. 18년 감옥살이를 한 오현우에겐 분명 생소하고 낯선 세상일 것이다. 18년 전 치열한 삶으로 인해 그 세상에서 격리되었던 그는, 이제 한윤희를 통해 지나간 세월 속의 세상을 본다. 빨치산 아버지의 상실과 그 이해에 이르는 먼 여정, 그리고 자신이 잡혀간 후 후배들을 도우며 본 반독재 민주화 과정, 그리고 독일 유학 기간을 통해 본 분단과 통일의 의미를 말이다. 결국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었던 두 사람의 삶이었지만 시간적으로는 상보적인 한사람의 삶이라고 해야할 관계다. 그리고 다시 남은 것은 한 사람의 삶이다. 바로 그렇게 이 소설은 사람의 삶이 주는 힘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이 주인공의 허구적 삶일지라도 그럴진대, 하물며 지은이의 삶과 함께 겹쳐지면 더 큰 힘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 그 흐름을 따라가기 조금 난해하다. 상권과 하권의 시점이 너무 갑자기 바뀌며, 마무리에 이르러선 힘이 조금 딸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가 던지는 물음. "새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본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유익했다.
황석영 선생의 책을 읽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무기의 그늘>, <객지> 정도가 아닐까? 사실 황석영식 글쓰기가 어땠는지 잘 기억 나진 않지만, 이 책 <오래된 정원>은 상당히 독특한 느낌이다. 소위 '황구라' 답지 않다고 느낀 것은 왜일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지리산 자락 마을의 오솔길, 그리고 그 주변에 핀 꽃, 그 주변 마을 등을 한 문장이면서도 한 문단 정도의 길이로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었지 싶다. 그런데 이 소설은 거의 그런 묘사에 있어서 아주 작심하고 한 듯하다. 이야기를 따라가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지겨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일 수도 있겠다. 황석영 선생의 12년만의 장편은 당연히 참여적이고 목적 의식이 충만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지만, 한 번 읽어본다면 이 책이 얼마나 서정적인 글인지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은이는 "서사의 결여와 감각주의라는 중병을 앓고 있는 한국문학이 풍부한 서사를 지닌 남성풍의 문학으로 거듭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 사실 풍부한 서정성과 정밀한 묘사와는 별도의 또 다른 맛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가 주는 힘이다.
이야기는 어쩌면 아주 단순하다. 하나의 문학 작품을 그럴 수는 없겠지만, 잘 추리면 단편 하나의 분량 정도라고나 할까. 80년 광주를 경험한 한 사내와 그가 도피해서 만난 한 여인, 이 소설은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 사내는 18 년을 감옥에서 살아왔고 그 여인은 감옥 밖에서 살았다. 그러나 결말은 감옥 속에 들어가 있던 사내는 사회로 다시 나와서 자신의 삶을 찾고, 감옥 밖에 살던 여인은 그 사내가 살지 못한 삶을 살다가 홀로 삶을 마감한다. 마치 감옥 밖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듯이. 그리고 사회에 복귀한 그 사내가 그 여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내용이다.
그 18년의 기간. 5월 광주로 시작해서 많은 자유와 민주를 향한 투쟁을 거치는 동안 유럽에선 사회주의가 허무하게 무너지는데 절반, 그리고 군사정권이 끝나고 우리나라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일어나 남이 북을, 북이 남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 때까지가 또 대충 절반이다. 그동안 세상은 너무 바뀌었다. 18년 감옥살이를 한 오현우에겐 분명 생소하고 낯선 세상일 것이다. 18년 전 치열한 삶으로 인해 그 세상에서 격리되었던 그는, 이제 한윤희를 통해 지나간 세월 속의 세상을 본다. 빨치산 아버지의 상실과 그 이해에 이르는 먼 여정, 그리고 자신이 잡혀간 후 후배들을 도우며 본 반독재 민주화 과정, 그리고 독일 유학 기간을 통해 본 분단과 통일의 의미를 말이다. 결국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었던 두 사람의 삶이었지만 시간적으로는 상보적인 한사람의 삶이라고 해야할 관계다. 그리고 다시 남은 것은 한 사람의 삶이다. 바로 그렇게 이 소설은 사람의 삶이 주는 힘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이 주인공의 허구적 삶일지라도 그럴진대, 하물며 지은이의 삶과 함께 겹쳐지면 더 큰 힘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 그 흐름을 따라가기 조금 난해하다. 상권과 하권의 시점이 너무 갑자기 바뀌며, 마무리에 이르러선 힘이 조금 딸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가 던지는 물음. "새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본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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