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1일 수요일

<한겨레 과학>을 만들자

내게 꿈이 하나 있다면 그건 오랜 뒤에 <한겨레과학>의 편집장이 되는 것이다. 왜 '과학'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여태껏 배워온 것이라서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왜 '한겨레'냐고 묻는다면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독립언론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럼 나보고 조선일보에 가라는 것은 아니겠지. 왜 '오랜 뒤에'냐고 묻는다면 현재 국내 언론사들을 아무리 둘러봐도 별로 장사가 될만하지 않은 '과학'에 대한 잡지를 만들 낌새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고 왜 '꿈'이냐고 묻는다면 현실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과학 기술'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되고 있다. 어린이들 상당수의 꿈은 과학자다. "나는, 나는 될 터이다. 육군 대장이 될 터이다" 이런 노래를 군사정부가 끝난 지금도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장군이나 대통령에서 많이 바뀌었다. 대학과 대학원 정원도 압도적으로 "이공계"가 많고 더 많아 질 것이라고 한다. 덕분에 박사들은 넘치고 넘쳐 사법시험과 변리사시험을 보기에 이르렀을 지경이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생활과학, 게다가 어디든 과학을 붙여야 폼이 나고 학문다운 느낌이 드는 세상이다. 그 어느 누구도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주역에서 과학기술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리 과학기술이 강조되고 있을까. 그건 바로 돈이 되기 때문, 다시 말하자면 과학과 경제의 결합 때문이다.

신문을 잘 보면 그 속에 답이 있다. 최근 신문의 섹션화 붐 속에 과학기술 기사는 어디에 자릴 잡고 있는가. 거의 모든 신문에서 과학기술은 <정보통신>면에 위치한다. 과학기술면 속에 정보통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 한겨레를 보자. <정보통신>은 정치 경제 사회 등등 계속 밀려 나가다가 마지막 '만화'의 앞이다. 게다가 <정보통신> 페이지 속에 들어가 보면 '과학'은 컴퓨터, 인터넷, 이동통신, 등등 8개 항목의 맨 마지막이다. 이건 정확히 한국 사회에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일치한다. 우리 나라만의 독특한 과학에 대한 정의, 즉 돈이 되지 않는 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돈이 되는 한에서는 과학기술이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생각해도 좋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관련 기사가 위치하는 두 번째 장소는 어딜까? 재미있게도 그건 <국제>면이다. 그리고 <국제>면의 과학기사 보도는 대게 외국 언론기관의 보도를 '받아서' 하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나라 과학기술 수준과 연관성을 갖는 부분인데 그만큼 과학기술은 해외, 선진국, 돈 많은 나라 편향적이다. 며칠 전 신문에 영국에서 knock-out 돼지(특정 유전자를 망가뜨려 원하는 유전형의 동물을 만드는 기술)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 연구에는 많은 투자와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돈은 돈 없고 힘없는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재미있는 예로 '전세계' 말라리아 치료 및 예방에 관련된 연구비의 총액이 97년 암 치료제 개발과 관련해서 '영국에서만' 쓴 돈의 절반 수준이었다고 한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아픈 병은 상품성도 없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 나라 탤런트 한 명도 비명에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마지막 과학기술 관련 기사의 자리는 <문화생활>면이다. 특히 의료, 건강, 식품, 미용, 최근엔 다이어트 등이 그렇다.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이면서도 사실 우리 생활과 아주 밀접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고한 학문의 울타리 속에 있는 학자들은 이런 '세속적' 내용을 멀리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기사는 상당 부분 선정적이 아니면 장삿속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상의 예를 들어 '어느 학회에서 모 교수가 콩을 먹으면 암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고 했을 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일지라도 그 속에 여러 가지 커넥션들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에 관한 기사들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가장 바람직한 것은 <과학기술> 자체의 섹션이 마련되는 것이겠지만, 과학기술관련 기사들은 원칙적으로 신문이라는 매체에 크게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방송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프로그램은 뉴스보다 다큐멘터리에 어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활자 매체에 있어서는 신문보다는 잡지에 더욱 어울린다. 게다가 무엇보다 전문성이라는 견고한 벽을 갖고 있는 과학기술을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하고 이해하는데는 신문이라는 제한된 지면보다 좀 더 많은 매수의 원고와 설명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변이 없는 발전은 한순간 반짝하는 붐에 그치기 십상이다. 여자 장관을 몇 % 할당한다고 해서 여성인권 수준이 높아지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여성 실 국장이 늘어나고 공무원에 여성비율이 더 늘어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학 기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 인간의 지위와 삶을 지배하는 위치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무지하고 너무 무관심하다. 인터넷의 세상, 생물 복제의 세상, 우주여행의 세상, 무병장수의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어느 날 눈 떠보니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좀 더 알아야 하고 우리의 과학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나는 <한겨레과학>이 창간되어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한국 과학기술의 현실을 알리고 과학기술에 대한 담론들과 한국 과학기술의 대중화와 민주화, 그리고 그를 통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귀사는 <한겨레과학>의 창간을 검토할 의향은 없는지. 아마 별로 돈이 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한겨레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가,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