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 14일 화요일

근조(謹弔) ˝오늘의 책˝!

먼저 대학 신입생들에게 주었던 한겨레신문의 철지난 옛 기사 하나를 읽어 보자. 제목은 "[책과 사람] 서점 대표들의 한마디." 내용은 몇몇 대학교 앞의 소위 "사회과학 책방" 주인들이 대학 신입생들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 중에서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의 김동윤 대표의 이야기를 잠깐 인용하고 싶다. "[그날이 오면]에서 지난 시기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단연 <전태일 평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선배들이 선물로 사주거나 새내기 배움터에서 단체선물로 구입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눈에 띄게 그런 현상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다른 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죠. 80년대 밤새 눈물로 책장을 적시게 했던 이 책이 벌써 자신의 생명을 다한 걸까요?"

그렇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2000년 11월 13일은, 바로 그 책의 주인공 전태일의 30주기 기념일이다. 그러나 그 뜻깊은 날에 나는 또 하나의 슬픈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바로 새 천년의 11월을 끝으로 신촌의 사회과학 책방 [오늘의 책]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다.

[오늘의 책]이 그저 하나의 작은 책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미 대학과 대학가는 변화하는 시대와 자본의 침식으로 충분히 상업화되었고, 또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임이 분명한 지금, 경쟁력없는 일개 작은 책방의 폐점은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더욱이 최근 인터넷 서점들과 시중 서점들과의 첨예한 대결(?)의 양상을 보이는 시대에 말이다.

그러나 주변에 종합대학만 5개가 있는, 그러나 하루 유동인구 33만에, 여관 1백32곳, 카페 2백82곳, 유흥시설 4백8곳인(그나마 이것도 92년 통계이니 지금은 더 많을 것이다) 신촌에, 몇 개 되지도 않는 서점 중의 하나가 [오늘의 책]이었다. 이미 예전에 사라져버린 [알 서점]에 이어 이제 [오늘의 책] 마저 생존을 포기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감상이나 신파적인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본디 [오늘의 책]이 있던 자리는 신촌 전철역과 연세대학을 잇는 연세로의 한가운데였으나 지난 96년 임대료 인상 문제로 문을 닫을 위기를 맞았었다. 그러자 주변 대학인들 및 동문들, 그리고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오늘의 책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고 거기에 호응한 많은 사람들의 정성으로 현재의 건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 이후 책방을 조합형태로 운영하고 지하의 '열린 공간'을 대학생들이나 작은 소모임들에게 모임 장소로 빌려주는 등, '문화공간'으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갖춰 오늘까지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대학가는 젊은이 놀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이 밝혀진 터. 영구불멸할 듯이 보이던 단골 당구장들마저 PC방, 게임방으로 바뀌는 디지털 혁명 속에 일개 작은 서점, 그것도 '골치아픈' 책이나 파는 사회과학 서점들이 살아 남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현재 [오늘의 책] 총무인 윤진희씨는 "내년 건물 재계약을 앞두고 경영 악화로 인해 지난 10월 28일 조합원 총회에서 폐점이 결정되었다"고 폐점의 경위를 설명하고, "다른 대학교 앞의 사회과학 서점들도 모두들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태지만 버티고 있는 실정일 것"이라고 현재의 실정을 말한다.

'책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 시조라는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구텐베르크여 안녕'이라고 일갈한 것이 36년 전이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까지 인쇄 매체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결코 그 세력을 지켜 왔다. 그러므로 일단은 맥루한의 이야기가 틀렸고, '책의 불멸'을 이야기한 움베르토 에코의 손을 들어줘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맥루한에 이은 새로운 도전자가 나왔으니 그는 <디지털이다>의 저자 네그로폰테이다. 그는 2020년이면 종이로 만든 책은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아직도 생존 경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책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데도 불구하고, 책방들은 이제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많은 선배들의 손때와 발길이 닿았던,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몇 시간 정도는 쉽게 책임져 주었던, 수많은 친구들 또는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때로는 구하기 어려운 금서들의 보급 통로였던, 또한 온갖 '현장'들의 소식지를 통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소통시켜 주었던, 그 책방들이 말이다. 이제 나는 진한 아쉬움으로, '님은 나를 떠났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진부한 싯귀를 지난 시대에 바치며 이 기사를 맺고자 한다. 잘 가라, [오늘의 책], 내 십이년지기 친구야...


2000년 10월 25일 수요일

축구 '한일전'에 대한 단상

24일 오후11시에 있었던 2000 아시안컵 축구대회 일본과 이라크의 준준결승은 축구를 보는 재미를 한껏 느끼게 만들어준 한판이었다. 경기는 일본의 4-1 대승으로 끝났다. 결국 일본과 중국, 한국과 사우디의 4강 대결로 압축이 되었다. 중동팀의 부진과 극동팀의 약진이 두드러진 대회라고는 하지만 역시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화제는 일본 축구의 약진일 것이다.

지난 달 시드니 올림픽 축구 8강전에서 일본은 미국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후반 종료 직전 어설픈 페널티킥으로 동점, 그리고 승부차기에서 일본 축구의 영웅 나카타 히데토시 (23, AS.로마)의 실축으로 4강행이 좌절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대회를 통해 일본 축구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단 한차례 월드컵 출전에 3전 전패, 승점 0, 득점 1, 한국전 역대전적 11승 14무 42패(90년 이후 5승 3무 7패) 이라는 기록들은 이제 장롱 속에나 넣어야 할 듯하다. 어제 이라크와의 준준결승 경기 전까지 일본은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이겨본 경험이 없었다 (역대전적 2무 2패).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93년 10월에 있었던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후반 종료 28초 전에 터진 동점골로 일본으로 하여금 사상 첫 월드컵진출의 좌절을 맛보게 한 팀이 바로 이라크였다. 그러나 어제의 경기는 일본 축구가 이제 확실히 달라졌음을 보여주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흔히들 일본 축구의 고질병이라고 불리는 스트라이커의 부재의 극복이나 개인기와 전술 능력 발전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일본 축구에 대한 투자, J-리그의 활성화, 외국인감독 영입으로 인한 선진기술 획득 등을 그 이유로 꼽는다. 모두 사실이다. 그 외에 일본 축구의 강점은 어디에 있을까.


먼저 두터운 선수층. J-리그 1부에만 16개 팀, 2부에도 11개 팀이 있다. 거기서 엄선된 선수들이기에 선수층이 두터운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스타 플레이어도 많다. 사령관 (일본에서 게임 메이커를 일컫는 말이다) 나카타가 빠진 자리에는 또 하나의 걸출한 미드 필더 나까무라 슌스케(22, 요꼬하마 마리노스)가 있다. 한국 팬들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선수이지만 앞으로 가장 주목해야만 하는 선수임에 틀림없다.


이번 대회에서 일본의 공격은 거의 나까무라의 발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1년만에 돌아온 나나미 히로시(28, 이와타 쥬빌로)와 작년에 당한 큰 부상에서 회복되어 교체멤버로 활약하는 오노 신지(21, 우라와 렛즈)도 있다. 이렇게 중원이 튼튼한데다, 지난 올림픽에서 급성장한 다까하라 나오히로 (21, 이와타 쥬빌로)와 니시자와 아끼노리 (24, 세레소 오사카)가 최전방에서 골을 노린다. 올림픽 예선 당시 숙소를 이탈해서 연예인과 데이트한 죄(?)로 잠시 감독의 눈 밖에 났던 교체 멤버 야나기사와 아쯔시 (24, 가시마 안토라즈)도 뛰어난 공격수이다. 이 외에도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수비진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세대 교체. 미우라 카즈로 대표되던 일본 축구 중흥의 1세대는 이제 국제무대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나나미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조 쇼지 등을 1세대의 끝자리에 넣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세대교체의 주역은 역시 축구 영웅 나까타 히데토시. 사실 현재 일본 대표의 주축들과 나이차이가 없지만 그는 1.5세대로 불려질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출현은 일본 축구의 붐을 몰고 왔으며, 일본 선수로서 세계 축구 최고 리그라는 세리에 A에 진출, 심지어 그의 어록이 출간되고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그는 동세대 젊은 일본 대표들과는 조금 그 궤를 달리한다. 그 이후로 나타난 오노, 야나기사와, 나까무라, 히라세 등등의 선수들이 바로 현재의 일본 대표선수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일본 축구에는 악재도 있다. 몇 년 전부터 J-리그의 몇몇 팀들의 재정 사정이 나빠져 매각을 결정하거나 지방 자치단체에 떼어 넘기려고 하기도 한다. 또한 막대한 자금력으로 데려왔던 초창기의 유명 외국 선수들을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올림픽 출장 후 나카타가 이번 대회 참가를 거부하고 이탈리아로 가버렸다. 트루시에 감독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축구협회와 여전히 사이가 안 좋다. 언제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경질설, 사임설 등에 연일 시달린다. 며칠 전엔 이번 대회가 끝나면 자신이 그만두겠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축구는 근본적으로 스타일이 바뀌었다. 이제 그 심연을 조금 들여다보자.


그 심연에는 '자유와 즐거움'이 있다. 현재의 일본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일본의 젊은 선수들은 상당히 자유분방하다 (나카타가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나올 때 딴 짓 하는 모습을 보라). 즐기면서 축구를 한다. 지나치게 애국심을 강요받지도 않는다. 국내 경기건 국제경기건 일본 축구의 특징을 꼽자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나친 승부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수들에게 큰 부상이 많지 않다.


또한 자유롭게 개인기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개인기의 부족은 개인기를 연마하는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측면보다 그것을 써먹을 기회의 부족이 더 문제다. 개인기로 돌파해봐야 붙잡히거나 걸려 넘어지는 축구에서 누가 돌파를 시도하겠는가. 승부만이 지상과제인 축구에서는 개인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수비 선수들에게 공을 차는 기술보다 상대 주공격수를 따라다닐 수 있는 끈질긴 체력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력과 체력의 부족, 혹자는 이것이 일본 축구의 약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정신력과 체력으로 이기려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 아닐까. 경기는 실력으로 이겨야한다. 예전 어느 축구 해설자는 '좀 거칠게 다뤄서 겁을 줘야 된다'는 말을 거침없이 방송에서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력으로 하는 축구가 아니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일본은 예선 리그 동안 단 2장의 옐로우 카드를 받았을 뿐이다 (이라크와의 준준결승에서 2장을 받았지만...). 나카타는 상대의 거친 수비에도 반칙을 하지 않는 선수로 유명하다. 트루시에 감독이 대 이라크전에 앞선 인터뷰에서 한 말, "필요하다면 일본도 거친 경기를 할 수 있다."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분명히 있다.


부담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기량을 펼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여건. 이것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이다. 축구에 대한 지원과 여건 만들기는 결코 자본의 투입만으로 끝이 아니다. 자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아닌 것이 있다.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국가대표선수들이지만 나는 때로 그들이 불쌍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재미있는 축구를 보기 위한 응원이 아닌, 자아도취적인 승리를 위한 부담만을 안기려했던 것은 아닐까?


오는 26일, 예선에서 일본이 4대1로 이겼던 사우디와 우리와의 준결승이 있다. 우리가 승리한다면 우리는 또 한번의 한일전을 보게될 가능성이 높다. 정말 멋진 경기, 깨끗한 경기, 그리고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줘서 승패를 떠나 박수를 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승리를 거둔다면 금상에 첨화하는 격이지만 말이다.

2000년 10월 17일 화요일

오래된 정원 (창비, 황석영)

올해 최고의 문제작 하면 바로 이 책일 것이다. <오래된 정원>. 책 선전을 겸해서 있었던 5.18 즈음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그리고 동인문학상 후보작 선정 거부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이 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자 까뮈의 대부(?) 김화영 선생은, 황석영 선생의 선정 거부 선언 후에도 줄기차게 이 책을 추천했다. 그러고 보면 그럴 것도 같다. 예전 김화영 선생의 글에서 드러나는 그 화려하면서도 실제적인 묘사를 닮아보였으니까 말이다.

황석영 선생의 책을 읽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무기의 그늘>, <객지> 정도가 아닐까? 사실 황석영식 글쓰기가 어땠는지 잘 기억 나진 않지만, 이 책 <오래된 정원>은 상당히 독특한 느낌이다. 소위 '황구라' 답지 않다고 느낀 것은 왜일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지리산 자락 마을의 오솔길, 그리고 그 주변에 핀 꽃, 그 주변 마을 등을 한 문장이면서도 한 문단 정도의 길이로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었지 싶다. 그런데 이 소설은 거의 그런 묘사에 있어서 아주 작심하고 한 듯하다. 이야기를 따라가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지겨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일 수도 있겠다. 황석영 선생의 12년만의 장편은 당연히 참여적이고 목적 의식이 충만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지만, 한 번 읽어본다면 이 책이 얼마나 서정적인 글인지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은이는 "서사의 결여와 감각주의라는 중병을 앓고 있는 한국문학이 풍부한 서사를 지닌 남성풍의 문학으로 거듭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 사실 풍부한 서정성과 정밀한 묘사와는 별도의 또 다른 맛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가 주는 힘이다.

이야기는 어쩌면 아주 단순하다. 하나의 문학 작품을 그럴 수는 없겠지만, 잘 추리면 단편 하나의 분량 정도라고나 할까. 80년 광주를 경험한 한 사내와 그가 도피해서 만난 한 여인, 이 소설은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 사내는 18 년을 감옥에서 살아왔고 그 여인은 감옥 밖에서 살았다. 그러나 결말은 감옥 속에 들어가 있던 사내는 사회로 다시 나와서 자신의 삶을 찾고, 감옥 밖에 살던 여인은 그 사내가 살지 못한 삶을 살다가 홀로 삶을 마감한다. 마치 감옥 밖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듯이. 그리고 사회에 복귀한 그 사내가 그 여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내용이다.

그 18년의 기간. 5월 광주로 시작해서 많은 자유와 민주를 향한 투쟁을 거치는 동안 유럽에선 사회주의가 허무하게 무너지는데 절반, 그리고 군사정권이 끝나고 우리나라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일어나 남이 북을, 북이 남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 때까지가 또 대충 절반이다. 그동안 세상은 너무 바뀌었다. 18년 감옥살이를 한 오현우에겐 분명 생소하고 낯선 세상일 것이다. 18년 전 치열한 삶으로 인해 그 세상에서 격리되었던 그는, 이제 한윤희를 통해 지나간 세월 속의 세상을 본다. 빨치산 아버지의 상실과 그 이해에 이르는 먼 여정, 그리고 자신이 잡혀간 후 후배들을 도우며 본 반독재 민주화 과정, 그리고 독일 유학 기간을 통해 본 분단과 통일의 의미를 말이다. 결국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었던 두 사람의 삶이었지만 시간적으로는 상보적인 한사람의 삶이라고 해야할 관계다. 그리고 다시 남은 것은 한 사람의 삶이다. 바로 그렇게 이 소설은 사람의 삶이 주는 힘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이 주인공의 허구적 삶일지라도 그럴진대, 하물며 지은이의 삶과 함께 겹쳐지면 더 큰 힘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 그 흐름을 따라가기 조금 난해하다. 상권과 하권의 시점이 너무 갑자기 바뀌며, 마무리에 이르러선 힘이 조금 딸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가 던지는 물음. "새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본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유익했다.  

2000년 3월 1일 수요일

<한겨레 과학>을 만들자

내게 꿈이 하나 있다면 그건 오랜 뒤에 <한겨레과학>의 편집장이 되는 것이다. 왜 '과학'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여태껏 배워온 것이라서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왜 '한겨레'냐고 묻는다면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독립언론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럼 나보고 조선일보에 가라는 것은 아니겠지. 왜 '오랜 뒤에'냐고 묻는다면 현재 국내 언론사들을 아무리 둘러봐도 별로 장사가 될만하지 않은 '과학'에 대한 잡지를 만들 낌새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고 왜 '꿈'이냐고 묻는다면 현실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과학 기술'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되고 있다. 어린이들 상당수의 꿈은 과학자다. "나는, 나는 될 터이다. 육군 대장이 될 터이다" 이런 노래를 군사정부가 끝난 지금도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장군이나 대통령에서 많이 바뀌었다. 대학과 대학원 정원도 압도적으로 "이공계"가 많고 더 많아 질 것이라고 한다. 덕분에 박사들은 넘치고 넘쳐 사법시험과 변리사시험을 보기에 이르렀을 지경이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생활과학, 게다가 어디든 과학을 붙여야 폼이 나고 학문다운 느낌이 드는 세상이다. 그 어느 누구도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주역에서 과학기술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리 과학기술이 강조되고 있을까. 그건 바로 돈이 되기 때문, 다시 말하자면 과학과 경제의 결합 때문이다.

신문을 잘 보면 그 속에 답이 있다. 최근 신문의 섹션화 붐 속에 과학기술 기사는 어디에 자릴 잡고 있는가. 거의 모든 신문에서 과학기술은 <정보통신>면에 위치한다. 과학기술면 속에 정보통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 한겨레를 보자. <정보통신>은 정치 경제 사회 등등 계속 밀려 나가다가 마지막 '만화'의 앞이다. 게다가 <정보통신> 페이지 속에 들어가 보면 '과학'은 컴퓨터, 인터넷, 이동통신, 등등 8개 항목의 맨 마지막이다. 이건 정확히 한국 사회에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일치한다. 우리 나라만의 독특한 과학에 대한 정의, 즉 돈이 되지 않는 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돈이 되는 한에서는 과학기술이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생각해도 좋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관련 기사가 위치하는 두 번째 장소는 어딜까? 재미있게도 그건 <국제>면이다. 그리고 <국제>면의 과학기사 보도는 대게 외국 언론기관의 보도를 '받아서' 하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나라 과학기술 수준과 연관성을 갖는 부분인데 그만큼 과학기술은 해외, 선진국, 돈 많은 나라 편향적이다. 며칠 전 신문에 영국에서 knock-out 돼지(특정 유전자를 망가뜨려 원하는 유전형의 동물을 만드는 기술)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 연구에는 많은 투자와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돈은 돈 없고 힘없는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재미있는 예로 '전세계' 말라리아 치료 및 예방에 관련된 연구비의 총액이 97년 암 치료제 개발과 관련해서 '영국에서만' 쓴 돈의 절반 수준이었다고 한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아픈 병은 상품성도 없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 나라 탤런트 한 명도 비명에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마지막 과학기술 관련 기사의 자리는 <문화생활>면이다. 특히 의료, 건강, 식품, 미용, 최근엔 다이어트 등이 그렇다.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이면서도 사실 우리 생활과 아주 밀접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고한 학문의 울타리 속에 있는 학자들은 이런 '세속적' 내용을 멀리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기사는 상당 부분 선정적이 아니면 장삿속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상의 예를 들어 '어느 학회에서 모 교수가 콩을 먹으면 암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고 했을 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일지라도 그 속에 여러 가지 커넥션들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에 관한 기사들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가장 바람직한 것은 <과학기술> 자체의 섹션이 마련되는 것이겠지만, 과학기술관련 기사들은 원칙적으로 신문이라는 매체에 크게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방송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프로그램은 뉴스보다 다큐멘터리에 어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활자 매체에 있어서는 신문보다는 잡지에 더욱 어울린다. 게다가 무엇보다 전문성이라는 견고한 벽을 갖고 있는 과학기술을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하고 이해하는데는 신문이라는 제한된 지면보다 좀 더 많은 매수의 원고와 설명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변이 없는 발전은 한순간 반짝하는 붐에 그치기 십상이다. 여자 장관을 몇 % 할당한다고 해서 여성인권 수준이 높아지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여성 실 국장이 늘어나고 공무원에 여성비율이 더 늘어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학 기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 인간의 지위와 삶을 지배하는 위치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무지하고 너무 무관심하다. 인터넷의 세상, 생물 복제의 세상, 우주여행의 세상, 무병장수의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어느 날 눈 떠보니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좀 더 알아야 하고 우리의 과학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나는 <한겨레과학>이 창간되어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한국 과학기술의 현실을 알리고 과학기술에 대한 담론들과 한국 과학기술의 대중화와 민주화, 그리고 그를 통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귀사는 <한겨레과학>의 창간을 검토할 의향은 없는지. 아마 별로 돈이 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한겨레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가,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은가.